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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시고랭미고랭 Sep 11. 2019

우울할 땐 스쿼트 100개

나를 지켜주는 주문

아무리 힘을 내려해도 이유 없이 우울한 날이 있다. SNS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지인들의 소식을 보거나 아이 어린이집에서 가끔 픽업 온 워킹맘&대디들과 이야기하는 날이 주로 그런 날이다.


이게 꽤나 위험한 것이

첫째, 남편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 나의 우울을 받아줄 만큼 여유가 없고

둘째, 설령 말한다 치더라도 공대 출신인 남편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은 문제와 솔루션에 대해 잘 이해를 하지 못해서(왜 우울해? 문제가 뭔데?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자칫 감정만 상하고 끝날 가능성이 높고,

셋째, 결국 이 우울이 아이에게 괜한 신경질이나 짜증으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랑 수다라도 떨면 좀 낫지 않을까 싶지만 한국의 친구들은 모두 일하는 시간이고, 어린이집에서 만나는 학부모들과는 영어로 가벼운 이야기만 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야기의 농도나 재미가 다르다. 마음 맞는 친구나 동료와 곱창전골 앞에 두고 소맥 한 잔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그 시간이 종종 그립다.


그렇다고 마냥 우울할 순 없다. 우울해봤자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아이 간식과 점심 도시락을 싸는 것으로 시작하는 일상은 계속되고, 외국에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부러워하는 주변인들에게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우니까. 그래서 우울할 때마다 나름의 해결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 나의 우울함 극복 프로세스 >


굳이 불필요한 쇼핑을 할 생각이 없으니 음식과 운동의 선택지가 남는데(먹는 건 남는 거니까!), 기왕이면 먹어서 살찌는 것보다 운동하고 몸이라도 좋아지면 더 낫지 않나 싶어 대부분 운동을 택한다.

 

우리 집엔 스쿼트 머신이 하나 있다.

무거운 무게 때문에 인도네시아로 건너올 때 이삿짐 아저씨들의 온갖 눈치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챙겨 온 것으로, 바른 자세로 스쿼트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품이다. 독박 육아를 하니 따로 운동 갈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남편의 잔소리를 감내하고 이사 직전 구매했다. 역시나 인도네시아로 건너와서 3개월 정도는 옷걸이로만 잘 쓰다가^^;;;;; 이렇게 축 늘어져 있느니 스쿼트라도 하자, 해서 시작했는데 제법 효과가 쏠쏠했다. 처음엔 하루 30개도 힘들었는데 조금씩 늘려서 하루 100개씩 무리 없이 가능하게 되었다. 드라마틱하게 날씬해지진 않지만 적어도 D자형으로 나왔던 배가 조금은 줄어들고, 허리 통증이 덜 하다는 점, 그리고 100개를 마무리한 후에 뭐라도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이 좋았다. 한 달 정도 꾸준히 했더니 확실히 허리둘레와 허벅지 둘레가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우울해질 때마다 "우울할 땐 역시 스쿼트 100개지!" 하며 스스로 주문을 외우고 스쿼트 머신 위로 올라갔다. 억지로 매일 하려고 하진 않았고, 생각날 때마다 짬짬이 나를 위한 소소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했다.


꾸준히 하지는 못했다. 한 달 전 뎅기열과 비슷한 열병에 걸렸다. 39도에 육박하는 고열과 오한, 극심한 근육통이 수반되었고 구역질을 계속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눈곱이 끼고 눈이 좀비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뎅기열과 다른 점은 구토감은 있지만 설사와 구토가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현지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열병인 듯한데, 그동안의 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증세가 더 심할 수 있다는 의견을 주셨다. 현지에서 링거도 맞고, 약 2주간 매일같이 통원 치료하면서 몸을 추슬렀다. 내가 아프다고 남편이 휴가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혼자 육아를 계속했는데 아이가 엄마가 아픈 걸 알고 생떼도 덜 부리고 말도 잘 들었다. 종종 "엄마 아파?" 하고 묻는데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그때마다 눈물이 찡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라 "응, 엄마 아파. 근데 금방 나을 거야. 다섯 밤만 더 자면 엄마 다 나을 것 같아" 하고 말해줬다. 운동을 쉬는 동안 몸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 운동할 기운도 없었다.


이제 다시 운동할 때가 되었다. 오늘이 바로 그 이유 없이 우울한 날이다. 아니, 사실 오늘은 우울한 이유가 있다. SNS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지인들의 소식도 보았지만 지난번 글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얻으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댓글들을 난생처음 마주했기 때문이다. 응원해주시는 따뜻한 댓글이 대다수였지만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기생하지 말라는 등, 신선놀음이라는 등 부정적인 댓글들도 있었다. 글을 내릴까 고민도 하고 알림이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끄적임에 내 감정이 흔들릴 필요도 없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내 삶이 흔들릴 필요도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삭제, 캡처 등) 가시지 않은 우울함을 떨쳐내기 위해 스쿼트 머신 위로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글에 우울할 땐 운동하면 좋다는 댓글이 있어 격하게 공감했다. 역시 우울할 땐 스쿼트 100개다! 오늘의 스쿼트 100개가 내일 더 상쾌한 나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아이가 일찍 잠들어 준 덕에 스쿼트 100개도 하고 글도 마무리한다. 매일 주어진 이 안온한 일상에서 못난 우울에 잠식당하지 말아야지. 내 마음도 내 건강도 내가 챙긴다.(챙겨줄 사람 아무도 없다) 씩씩하고 건강해야 이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도 남편과 아이에게 더 잘해줄 수 있다. 기운 내자. 내일도 생각나면 스쿼트 1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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