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sol Park Aug 08. 2016

공자의 사회.


1.

때때로 공자볼품없는 보수주의자, 꼴통 복고주의자로 평가되곤 한다. 사실상 춘추시대를 살면서 그가 한 것이라고는 노나라에서 3년간 대사구를 지낸 것과 수백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여행 다니면서 인과 예의 중요성을 염불처럼 되뇌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그는 술을 매우 즐겼으며, 그 어려운 여행 중에서도 구겨진 옷은 입지 않고 정돈된 찬이 아니면 들지 않았을 정도로 까탈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니 상갓집 개 같은 이 비루먹은 늙은이의 일대기에 한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것은 결단코 과분한 일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자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나중을 위해 남겨두고, 먼저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가 어떠했는지부터 간단하게 살펴보자.


2.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란 중국에서 B.C. 770 주(周)의 동천(东迁) 이후부터 B.C. 221 진시황제의 통일까지의 시대를 일컫는 말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된다. 춘추시대의 춘추는 공자가 집필한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유래 하였고, 전국시대는 한나라 유향이 집필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춘추전국 이전의 통일왕조였던 주나라의 통치 시스템은 종법질서와 봉건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사회질서는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노비(奴婢) 로 분화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토지 및 인력이 분배되었다. 예를들어, 주나라 초대 왕이었던 주문왕(周文王)은 건국일등공신이었던 강태공(姜太公)을 제(齊)나라의 제후로 봉했고 산동성 일대의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각국의 제후들은 모두 주왕실과 친인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반란의 염려가 적었다. 다시 말해 천하가 하나의 큰 가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시간이 몇 백년이나 지나고 그 핏줄이 주는 도덕적 구속성과 애절함이 희미해지게 되자 봉건적 질서는 해체되기 시작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견융의 침입을 받고 주가 그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되자 (주의 동천) 주나라 왕실을 그야말로 X밥으로 인지한 제후들은 자신의 자치권을 강화하기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춘추시대의 개막이다. 춘추 초기에 주왕으로부터 봉해진 제후국은 총 140여 개였으나 춘추 말기에는 진(秦), 초(楚),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연(燕)의 7개국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하극상과 제후들의 사적 욕망 추구가 난무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覇者)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하곤 했다. 이 패자를 중심으로 각 제후국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그러다보니 잦은 전쟁이 일어났는데 기록에 남겨진 전쟁의 횟수만도 1,200회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상-주 시대, 나아가 춘추시대까지의 전쟁 형태는 시위전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전차가 평원지대를 달리며 전투를 벌이는 형태였기 때문에 보병은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였다. 당시 군인은 고귀한 직업이었기에 하층 귀족인 사(士)가 상비군이 되었고, 상인, 노예 등은 전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전차전은 귀족형 전쟁으로서 일정한 진법에 따라 전차가 죽 늘어선 상태에서 북이 울리면 공격이 시작되었고 전투 도중에도 양쪽 모두 예절을 지켰다. 이는 보병과 기병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살육과 병탄전으로 점철되는 전국시대의 전쟁형태와 확연히 구분 되는 것이었다.



3.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들 역시 활발해 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한 반작용이니까. 실제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사상가와 정치가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실제적으로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경우도 많았다. 가령,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그 당시 가장 고부가가치 생산수단이었던 염전과 제철을 국유화 하였으며, 상업과 수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으로 제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고, 결국 제 환공은 제후국의 맹주로서 춘추오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니 이 모든 것이 사실 관중의 공이었다. 그는 매우 유물론적,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을 피력하였는데 그 내용은 그의 책 <관자(管子)>에 잘 묘사되어 있다. 잠시 살펴보자.

"나날의 생활이 즐거워지면 자연히 예의를 분별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만 하면 도덕의식은 저절로 높아진다." (목민편)
"물질이 풍부하기가 천하에서 제일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천하를 이끌 수 없다."(칠법편)

화려한 정치적 커리어 뿐 아니라 그의 삶 역시 아름답다. 그는 젊었을 때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으나 운 좋게 ‘포숙아’라는 친구를 두었는데, 절친이었던 포숙아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돈을 떼먹어도 이해, 정적으로서 피터지게 싸우다 잡혀 와도 쿨하게 용서하고 오히려 환공에게 재상으로 천거하기까지 하는 보살의 멘탈을 선보인다. 후일 관중은 포숙아를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어머니였으나, 나를 진정 알아준 이는 포숙아 였도다”
실패의 온상이자 미운오리새끼였다가 찬란한 봉황으로 날아오른 관중과 그 가능성을 알아보고 끝까지 믿어준 슈퍼 멘탈 갑 포숙아의 관계를 일컬어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한다. (이쯤되면 이건 친구사인지 모자관곈지 무척 헷갈린다)

이어, 묵자(墨子)로 알려진 묵적의 삶을 보자. 묵자는 일찍이 ‘겸애(兼愛)’에 기초한 반전평화사상으로 당시 사회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겸애는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남에게 이롭게 하면 하늘의 뜻과 일치하여 평화롭게 된다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또한, 대표적인 민중사상으로서 치수공사를 하다 다리의 털이 모두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는 우 임금을 섬기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였고, 절용(節用, 아껴쓰고), 절장(節葬, 화려한 장례를 금지), 비악(非樂, 화려한 음악도 금지)을 주장하며 건강하고 검소한 노동자의 삶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묵자가 진실로 위대한 까닭은 비단 그의 사상 때문뿐만 아니라 그 실천 때문이기도 했다. 묵자는 그 당시 가장 잘 정비된 민중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하층민으로 구성된 그의 조직은 신뢰가 두텁고 싸움을 잘 하기로 유명했는데, 정복전쟁을 일으키는 군주만 찾아다니며 그렇게 방해를 해댔다. 일례로 유명한 공성기술자였던 공수반이 갖은 공격을 해대도 묵적이 이를 모두 막아 내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묵수(墨守)라는 성어로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진(秦)나라에 이르러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나, 이후 협객의 원류로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민중의 조직화와 그를 통한 계급 균형의 창출, 나아가 모두가 모두를 사랑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 그리고 그를 위한 쉼 없는 실천. 그런 점에서 묵자는 당대 최고의 정치 공학자이자 혁명가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고 보면 공자는 더욱 이론은 장대하나 실천은 빈약한 소위 ‘강남좌파’ 같아 보인다.

그밖에 흔히 합종연횡 이라 불리는 뛰어난 외교로 천하를 움직인 소진과 장의, 귀신같이 병사를 부려 오초전쟁을 승리로 이끈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 정신승리의 아이콘이자 진정한 멘탈갑 노자와 장자 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자가 도대체 성인의 반열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공자의 텍스트는 이런 제자백가들의 화려한 성취에 비해서도 일견 매우 현실적이고도 급진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4.
공자의 정치사상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로 요약 될 수 있다. 이른바 정명론(正命論) 이다. 공자는 정치와 삶이 어지러워진 원인은 각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군주가 군주의 도리를 다 하여 백성에게서 취할 만큼만 취하며 신하는 자신의 한계와 자리를 알고 질서를 굳건히 지키고 바른 생각을 해낸다면, 또한 아버지는 자식을 성심껏 보살피고 자식은 아버지를 끔찍이 섬긴다면, 다시 말해 사회의 각 구성이 과하거나 모자람 없이 해야 할 바를 온전히 수행 한다면 사회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풀자면 '다들 일 똑바로 하라'는 말)

아래 논어 안연편을 보자.

子曰, 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 안연편)
(제공경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孔子對曰 子爲政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尙之風, 必偃 (논어, 안연편)
(계강자가 공자에게 나쁜 놈들은 죽여서 기강을 바로잡으면 어떠하냐고 묻자)
그대가 정치함에 어찌 사람을 함부로 죽이려 하시오 당신이 선을 추구하면 백성도 이에 따를 것이며,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습니다. 풀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바람에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정명론에 대해 신분제를 옹호했다는 논박을 가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다소 과한 지적이 될 것 같다. 정명론은 신분질서의 강화보다는 사회 구성체의 ‘역할’에 대한 것이며, 후일 전국시대처럼 국가의 고도화 및 대규모 병탄살육이 발생하지 않았고, 주나라의 종법질서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아직 가지고 있을 때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이어, 공자는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근본적인 요소를 물질이 아닌 ‘가치’에 기댄다. (앞서 관중이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접근..).

子貢問政,子曰 足食足兵民信之矣. 民無信不立. (논어, 안연편)
자공이 물었다. “선생님, 정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충분한 식량과, 강력한 병사, 그리고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백성들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


공자에게는 국가의 존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신뢰’이다. 약속을 잘 지키고 서로를 굳건히 믿는 마음이 일반적인 사회. 그것이 진정으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국가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인(仁)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논어만 놓고 보더라도 인(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서술이 맥락에 따라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논어를 살펴보자.

仁者 先難而後獲, 可謂仁矣. (논어, 옹야편)
어진 사람은 어려움은 남보다 먼저 하고, 보답은 남보다 뒤에 얻으면 참으로 어질다 할 수 있다.

仲弓問仁,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 안연편)
중궁이 인에 대하여 묻자 자기가 하고 싶지 아니 한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논어, 안연편)
번지가 인에 대하여 묻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앎에 대하여 묻자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번지가 말뜻을 못 알아듣자 다시)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바르지 못한 사람위에 두면 정직하지 않은 사람도 정직하게 된다.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논어, 위영공편)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사람은 삶을 위하여 인을 해치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룩하는 일은 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개념인 인(仁)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여 본다면 바로 ‘인간다움’이 아닐까 한다. 인(仁)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 할 줄 안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속이지 않으며, 오히려 타인을 껴안을 줄 안다. 살벌한 사회에서 그 건강한 인간다움을 우리는 반드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마 공자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게 ‘인간’ 이니까.  


6.
하지만 공자가 단지 인을 부르짖는 것으로 그쳤다면 그의 말들은 아마 고담준론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딴 건 아무나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약자가 고통 받는 구조를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 한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사람에게서 구할 수밖에.
그래서 ‘인(仁)’ 만큼이나 공자가 강조 했던 것이 ‘예(禮)’이다. 예(禮)는 현대에 와서 제사 따위를 지내거나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Social Norm 따위로 가볍게 취급 되고 있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공자에게 예(禮)란 인(仁)을 함양하는 방법론이자 행동양식이자 교육 이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 방침으로 공자가 선택한 것은 ‘육예(六藝)’였다.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논어, 술이편)
군자의 이상적인 생활이란 도에다 뜻을 두고 덕을 닦으며, 인을 의지하며 육예를 생활할 것이다.


육예(六藝)는 원래 주나라의 엘리트 양성 시스템으로서 예 (禮,의례)·악 (樂,음악)·사 (射,활쏘기)·어 (御,말타기)·서 (書,서예)·수 (數,수학)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육예의 오묘한 진리를 밝히기 위해 공자는 육경(六經)을 썼다.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 역경(易經), 춘추(春秋)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공자는 법도와 정도를 절도 있게 지킬 줄 아는, 다시 말해 매 상황에서 적절함을 지킬 줄 아는 ‘멋있는 사람’을 양성하려 했다. 그리고, 공자는 단지 교육에 그치지 않고 아예 예가 몸에 새겨지도록 하였다. 어떤 곤란한 상황에서도 무의식중에도 튀어나올 수 있도록.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廳 非禮勿言 非禮勿動. (논어, 안연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 것이다.

이렇게 외적 행위규범인 예의 철저한 내면화를 통해 탄생하는 것은 인(仁)한 마음을 체화한 ‘좋은 인간’이다. 그들을 유가에서는 ‘군자(君子)’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군자는 공자의 사회를 끊임없이 계도 해 나갈 것이다.


7.
공자가 쓰러져가는 사회를 위한 내린 처방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인간이 타락하면 시스템 역시 무너지게 마련이다.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것도,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도, 사람을 치료하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일인 까닭이다. 가장 단단한 시스템은 인간적인 시스템이다. 자신감 넘치는 인간,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따뜻한 인간,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는 결코 그 존립을 위협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시스템은 이미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유기체니까.

공자의 가장 멋진 점은 이 ‘좋은 사람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사회의 가치기준을 바꾸려 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子曰 君子義以爲上. (논어, 양화편)
군자는 정의를 가장 숭상한다.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논어, 이인편)
군자는 정의를 밝히어 이해하고, 소인은 이익을 표준으로 하여 이해한다.

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논어, 이인편)
군자는 말은 더디되 행동은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논어, 자로편)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뇌동하되 화합하지 않는다.
신영복의 해석에 따르면,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和는 조화, 同은 지배/개체성의 배제)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以不周. (논어, 위정편)
군자는 두루 통하여 편파적이 아니며 소인은 편파적이며 통하지도 않는다.

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논어, 위영공편)
군자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서 구하나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논어, 술이편)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고 너그러우며, 소인의 마음은 항상 근심에 차 있다.

子曰 君子不器 (논어, 위정편)
군자는 기계가 아니다.

子曰 君子貞而不諒. (논어, 위영공편)
군자는 굳고 바르나 소신을 맹목적으로 고집하지 않는다.


공자는 말한다. 신분이 높고 가진 것이 많다고 존귀한 사람이 아니다. 출신이 비천하고 곤궁하더라도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의 있는 사람, 타인과 무리 없이 공존할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마음이 항상 평화롭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적인 사람, 자신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는 성찰로 극복해 나가고 종국에는 그것을 껴안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이가 바로 군자(君子)다. 군자는 애써 꾸미지 않아도 강건한 멋이 묻어나고, 가만히 있어도 절도가 있다. 아무리 슈퍼 금수저로 태어났더라도 인간다운 덕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인이다. 군자가 되는 것이 훨씬 높은 성취이고, 사회는 마땅히 그런 이들을 존경해야 한다.


8.
하지만 군자의 길은 고독하고 힘든 가시밭길일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을 부러워하고, 권력은 인간다움을 가장 미워하는 까닭이다.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논어, 위영공편)
군자는 곤궁을 잘 견딜 수 있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마구 행동을 한다.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논어, 학이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뜻을 이어가려는 군자들에게 공자는 담담히 속삭인다.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논어 이인편). 덕은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이웃이 있다. 이것은 기원이 아니라 단정이며, 소망이 아닌 확신이다. 오늘날까지 공자는 힘주어 말한다.

정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긴 것이 정의가 아니다. 정의가 결국 이긴다. 우리는 위대한 인간(人間)이니까.


9.
드라마 ‘육룡이나르샤’에서 고려말의 대표적인 탐관오리이자 삼한제일검이자 미의 화신(!)이었던 길태미는 살해당하기 직전 이렇게 절규한다.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고, 부자는 빈자를 인탄한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진리야!”

인생오십지천명 (人生五十知天命). 공자는 오십 세면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가 쉰을 먹도록 천명을 아는 것은 고사하고 그나마 떠벌리는 말이 ‘적자생존’ 뿐이라면 확실히 불우하고 비루한 인생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길태미의 죽음은 여지없이 측은했다. 그러나 이런 불행이 개인에 그치지 않고, 사회에서 수탈이 정당화되고 강자의 전횡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불우하기보다는 부정이며, 비루하기보다는 악덕이다. 고려의 지배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은 백성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고, 그것을 대대손손 세습하여 부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부자는 계속 살찌고 백성은 야위어갔다. 그러한 모순들이 오랜 세월 축적 되어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조선의 사대부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이들은 예를 극복하고 사리사욕으로 돌아갔으며, 인을 버려 일신의 안위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악덕의 최후는 언제나 몰락이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생각한다. 춘추전국시대에 비하면 ‘헬조선’이란 구호는 조금 과장된 것으로 보이긴 한다. 적어도 우리는 GDP 11위에 빛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며, 제도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정비된 민주주의를 누린다. 거의 모든 인구가 100만원짜리 기계를 손에 들고 다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의 혜택을 누린다. 공공서비스는 훌륭하다. 보건지표는 물론이고 교육수준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OECD 국가들 중 산재사망률이 가장 높아 (2006, 21개국 중 1위) 안전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두번째로 긴 시간동안 일하는 바람에 (2011, 22개국 중 2위) 아버지는 가족을 지킬 도리를 잃어간다. 그런데도 실질임금 상승률은 더디고, 가계부채는 늘어간다. 기업의 소득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가계소득은 어째 갈수록 떨어진다. 책임은 역시 대중의 몫이다. 소득세와 부가세를 올려 살찐 기업을 먹인다. 극단적으로 경쟁적인 사회시스템 때문에 교육이 강조되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덕분에 어린이 및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제일 낮고 (2013, OECD 23개국 중 최하위) 9년째 자살률 1위이다. (2011, 인구 10만명당 1,5681명 자살) 이 우울한 초상 속에서 우리는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옆 사람을,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렇기에 21세기 한국은 여전히 ‘헬조선’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의 부덕은 때때로 유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또한 유교와 효과적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나이 많은 자들은 버릇이 없다며 젊은이들의 언로를 막았고, 높은 직위에 앉은 자들은 대중을 위세로 눌러 발아래 두고자 했다. 오작동하는 충(忠)과 효(孝) 덕분에 옳은 것들이 효과적으로 통제되었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좋은 삶과 꿈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었나.
(때때로 그릇된 욕망과 부정의는 어버이를 참칭하기도 하였다. 세상에,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반동적 어용단체가 자그마치 ‘어버이’ 연합이라니!)



유교의 정수는 인간을 배제하는데 있지 않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삶을 순선하게 하며, 공간을 정의롭게 가꾸는 데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의 건강한 삶과 말에 공맹의 오묘한 이치를 들어 제동 걸려는 무엄한 시도를 하거든 또박또박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자.
옳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권위에 쉽게 복종하며, 약자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군자의 도가 아니라고.

공자의 사회에는 단 한 순간도 인간이 배제되어 있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