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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소년 Sep 09. 2016

가장 아름다웠던 사연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뜻하던, 뜻하지 않던 감당하기 힘든 순간을 만나게 된다. 내게도 당연히 여러 차례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 순간은 지붕 없는 곳에서 예고 없이 불어닥치는 소나기에 온 몸이 젖었버린 순간이었고, 눈길에 미끄러져 나에게로 들이닥치는 자동차를 마주한 순간이었고, 여자 십수 명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수다를 세 시간 넘게 듣고 있어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밤이 깊어 막차 버스가 끊긴 순간이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제주에서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순간은 그들이 가진 '사연'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 모두 각자의 여행이 있듯, 각자의 삶이 있고, 마찬가지로 각자의 사연도 있다. 내가 제주 곳곳에서 만난 '사연'은 제주가 가진 바다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속은 바닷물을 모두 모아 머리에 이는 듯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기도 했다.

 사연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서 지긋이 웃어 보였다. 고독을 씁쓸히 삼켜내는 그 모습마저 아찔했던 나는 그들이 가진 삶의 무게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해가 저무는 시간, 인적이 드문 해변가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곳에선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바다의 소리뿐, 그 어떤 소음도, 간섭도, 강요도 없다. 바다의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바다와 당신은 하나가 될 것이고, 당신은 오로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잠시 우리 같은 여행자를 위해 마련된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다. 벤치가 없다면 모래사장에 누워도 좋고, 풀밭에 뒹굴어도 좋다. 그저 바다를 바라볼 수만 있으면 된다. 기울어진 우리의 그림자처럼 내 마음을 바다에 기울이고 바다 뒤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땐 눈물이 핑 돌 것이다. 그 눈물은 여행만이 주는 감동이고 또한 그리움이다. 어쩌면 또 사랑이리라.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토끼섬이 보이는 하도리 해변 어딘가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그러나 무덤덤한 것이 오히려 더 절실하게 들려왔다.

 "남자친구가 제주도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다른 일 다 제쳐두고 저랑 제주에 와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몸이 너무 아파서 제주에 못 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제주를 진짜 많이 그리워했죠. 그때부터 저는 나중에 남자친구에게 보여주려고 혼자서 제주에 왔어요. 내가 보낸 제주에서의 시간을 나중에 남자친구와 다시 마주하려고요."

 그녀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하늘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혼자 만의 시간에 사랑이 더해지면 그 시간은 어떤 기분일까? 사랑 앞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6개월 정도 혼자 제주를 여행했는데, 어느 날 남자친구랑 헤어지게 된 거예요. 남자친구가 저기 하늘나라로 갔거든요."

 그녀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찔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눈빛과 그 걸음걸이에는 슬픔이 가득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했던 그녀의 이별은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를 쳐다보던 내 시선은 결국 바다를 향했다. 그녀의 이별과는 다르게 바다는 햇살을 머금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남자친구를 바다에 뿌려주고 나서도 가끔 제주가 그리워 혼자 오곤 해요. 이곳에 오면 우리 추억들이 가득하거든요."

 나는 말이 없었다. 어떤 말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어설프게 그녀를 안아주기에는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계속해서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쩌면 그녀는 남자친구를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작년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같이 보낸 추억이 많았는데, 이젠 혼자였을 때의 시간이 더 많아져버렸어요. 더 이상 혼자인 제주도는 슬퍼서 안 오려고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남자친구와 보냈던 추억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고 전부 덮어둘 거예요. 남자친구도. 우리 추억도."

 태양이 모두 지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바다 쪽을 향해 걸었다. 바닷물이 그녀의 발을 찰랑거리며 지나갔다. 그녀는 석양을 등진 채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혼자인 제주는 너무 슬퍼서 다시 안 올 거예요. 다만, 소원이 있다면 내가 혼자 여행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남자친구에게 닿았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왔다고 남자친구가 질투할 거야."


 석양을 등 지고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는 제주가 품은 바다보다 더 아름다웠다. 내 인생에 다시 또 이런 미소를 볼 수 있을까? 슬픈 눈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버린 그녀의 미소가 아련한 추억을 품은 듯 조용히 내게 밀려들었다.

 어느새 석양마저 바다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에게 비치던 햇살이 저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저문 것은 햇살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오래도록 간직한 그의 대한 사랑도 함께 였다.


 나는 그녀를 힘껏 안아주고 싶었다. 뼈가 으스러져도 좋을 만큼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슬픔을 내가 조금이라도 감당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설프던, 진심이던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제주의 석양이 가져다주는 그리움이었을 테니. 그 순간의 그리움에 눈물이었을 테니.

 그녀는 끝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고 태양이 모습을 전부 감출 때까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모두 지고나서야 그녀는 뒤돌아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슬아슬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혼자인 제주는 너무 슬퍼서 다시 안 올 거예요. 다만, 소원이 있다면 내가 혼자 여행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남자친구에게 닿았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왔다고 남자친구가 질투할 거야."

 이 바다는 어쩌면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함께 쌓아가던 추억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붉게 물든 바다를 보며 기도했다.


 '당신에게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주 곳곳에 남긴 그녀의 흔적들이.'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였다. 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 눈물은 여행만이 주는 감동이고, 그리움이고, 어쩌면 또 사랑이리라.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담요를 말없이 덮어주었다.


 어둠이 밀려오고 밤하늘에는 별이 한가득 우리를 비쳐주고 있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고요한 가운데 조용한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우리를 감싸주었다.

 "이 바다가 제 남자친구가 있는 곳이예요. 이제 정말 안녕."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나즈막히 말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보지만 눈가에 고이는 눈물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 그 걸음걸이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진하게 슬퍼보였다.


 '제주 바다, 정말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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