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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소년 Sep 25. 2016

월정리 바다에 남긴 약속

우리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당신과 걷던 월정리 고운 모래사장의 부드러움을 기억해요. 해변가에 편안하게 누워있던 강아지를 쓰다듬는 당신의 손은 결혼을 약속한 커플인지  멀리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보다  하얗게 물들었어요. 당신은  하얀 손으로 거칠고 못나 흉터 많은  손을 잡아주었어요. 얼음장 같이 시리고 차갑던  손에 따뜻했던 순간이 있다면 당신의 손과  손이 맞닿아 우리의 온기를 나눠 가졌던 순간뿐이었을 거예요.  손에 퍼지는 따뜻한 당신의 온기가  마음까지 다가왔어요. 그때 알게 됐어요.  마음에도 봄이 왔다는 .

 

'계절이 지나가고 이제 가을바람이 부는데, 아직도 내 마음에 당신의 온기가 남아있나 봐요. 당신을 잊기 전까지 내 계절은 평생 봄일 것 같아요.'


 성산에 아침이 밝았다. 다를 것 없는 아침이 묘하게 다가왔다. 당신과 함께 광치기해변을 걸으며 성산일출봉 옆으로 뜨는 태양을 보고 싶었지만, 당신은 아침잠이 많아 창가에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서야 눈을 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온 당신은 민낯을 보여주기 싫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샤워실로 뛰어갔다. 그 모습은 아직 풋풋한 마음을 간직한 새내기 대학생 같았다. 거실에 앉아 세수도 안 하고 조식 먹으러 나온 사람을 한번 보고, 샤워실에서 나와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방으로 뛰어가는 당신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에게서 민낯에 트레이닝복, 슬리퍼 질질 끄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는 어설픈 손길로 당신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내 머리를 말릴 때는 박박 긁어가며 오로지 빨리 말리는 것을 목적으로 머릿결을 휘젓곤 했는데, 당신의 머릿결은 마치 가느다란 보석과 같아서 살짝만 닿아도 부서질 것 같았다. 흑색의 고운 보석에 상처 나지 않게 부들부들 떨어가며 당신의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당신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내게서 헤어드라이기를 뺏어갔다. 나는 당신의 눈빛에 "당신이 너무 소중해서 그랬어요." 루시퍼의 심정을 이해하며 속으로 울었다. 당신이 어설픈 내 손길을 느끼며 이런 게 내 사랑이라 느껴주길 바랐다면 욕심이었을까?

 당신이 스스로 머리를 말리고 나서 나는 고데기를 집어 들고 이번에는 자신 있다는 듯 내게 머리를 맡겨보라고 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 고등학생 때부터 아침마다 고데기로 웨이브를 넣어온 나는 나름대로 고데기 장인이라 자부했다. 그러나 당신의 머리 앞에 서자 또 떨고 말았다. 고운 보석에 이렇게 뜨거운 열을 가하다니,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당신의 머리에 웨이브를 넣어주는데, 나보다 긴 머리에 고데기를 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도 웨이브가 예쁘게 들어가지 않았다. 당신은 입을 살짝 벌리고 집중하는 내 모습에 슬며시 웃고는 자신의 머리가 곱슬이라 잘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의 말처럼 나는 곱슬머리를 펴주지도 못하고, 예쁘게 웨이브도 넣어주지 못한 채 엉성한 머리의 당신을 거울 속에 담고 말았다. 그러나 당신은 웃으며 말괄량이 삐삐처럼 머리를 양갈래로 묶었다. 나이 들면 이런 머리도 못한다며 시무룩한 내게 괜찮다, 미소 지어 주었다.


 우리는 성산포 바다가 푸르게 펼쳐진 한옥 카페에 갔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카페는 명랑한 직원의 인사에 들어설 때부터 절로 미소 짓게 되는 곳이었다. 혼자 글을 쓰러 몇 번 왔었던 이 카페에서 나는 처음으로 백년초 차를 주문했다. 이곳에는 외국에서 만드는 여러 종류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데,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당신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처음 시켜본 백년초 차의 향은 내 배려에 미소 짓고 있는 당신처럼 은은하게 내 안에 스며들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커피 대신 매일 백년초 차를 마셔도 될 것 같았다.


 카페를 나와 엄마 손맛이 느껴지는 작고 허름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곳은 혼자 섬으로 떠나온 내게 정말 친엄마의 정성처럼 음식을 맘껏 퍼주고도 더 맛있는 걸 못 해줘 미안해하던 곳이었다. 나는 제주에 사는 어머니께 오랜만에 인사도 할 겸 그냥 당신을 보여주고 싶어 이곳에서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쌀밥이었다. 어머니는 딱히 우리에게 밖으로 보여지는 관심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몰래몰래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 몰래 사랑을 키우시지만, 그 사랑이 눈에 다 보여 그냥 웃으며 고마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셨다.


 우리는 손수 향수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행원에 있는 농공단지로 갔다. 그곳에는 다 무너져 가는 공장 사이로 산뜻한 분위기의 건물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올까, 의심스러운 곳이었다. 들어가 보니 내부는 공장을 개조해 따뜻한 카페 분위기가 흠씬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화장품을 제조하는 공장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규모가 축소돼 두 개의 건물 중 하나는 화장품과 향수를 파는 카페로 리모델링하고, 옆 건물에서 화장품을 제조하고 있었다.

 리모델링된 카페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건물 한 벽면을 전부 유리창으로 만들어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왔고, 해가 기울어지며 햇살이 포근하게 드러눕는 듯했다. 화장품은 대부분 예쁘게 포장된 유리병에 보관되어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카페 분위기에 취해 당신과 함께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는데, 직원이 향수 만들 준비가 다 되었다고 준비된 방에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은 제주에서 자라는 꽃들의 향이 가득 담긴 10가지 종류의 향수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에 드는 향기를 찾아 선물해 주기로 했다. 수선화, 유채꽃, 벚꽃, 수국, 감귤, 동백꽃 등등 10가지 향 중 나는 유채꽃과 동백꽃 향을 골랐다. 당신이 내 손을 잡아, 내게로 와 봄이 왔기에 나에게 있어 당신은 봄을 알리는 유채꽃과 같았고, 동백꽃은 가장 아름답게 핀 시기에 툭 하고 떨어진다는 그 묘한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향수를 만들고, 동백꽃 향수를 담은 용기에는 '나 만날 때', 유채꽃 담은 용기에는 '상큼하고 싶을 때'라는 스티커를 붙여 당신에게 선물했다. 적잖이 동백꽃의 슬픔과 당신의 봄이 따뜻했나 보다. 당신이 내게 준 향수에는 '자아도취', '깍쟁이'라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아마 당신이 보는 나의 이미지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보는 나는 자아도취에 빠져있고, 깍쟁이였나 보다. 당신은 아직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아주 조금 슬퍼졌다.

 그러나 스티커에 담긴 내용이 어떤 의미였던 간에 우리는 이제 제주 어디를 가나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 향을 담았으니 제주 어디에서든 서로의 향이 풍길 것이다. 제주에서 우린 평생 같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따뜻한 햇살이 드러눕는 카페를 나와 월정리를 향해 걸었다. 월정리로 가는 길은 해안도로였다. 오른쪽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졌고, 바다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석양이 지는 시간, 혼자 해변 걷는 것을 즐겼던 여태까지와는 달리 오늘은 내 옆에 당신이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이 이 아름다운 바다를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말없이 두 손 꼭 잡고 보이는 길을 한없이 걸었다.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우린 소중하게, 무엇보다 소중하게 이 순간을 가슴속에 담았다.

 월정리에는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석양의 한가운데 당신은 나와 손을 잡고 걸었다. 아니, 행원리에서 월정리까지 오는 동안 손을 놓지 않고 계속 걷다 보니 우리는 월정리 석양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저 멀리 모래사장 한편에 드러누운 강아지를 보자 그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지금 당신과 잡은 손에서 봄을 느끼며 석양이 지는 묘한 슬픔을 품고 있었지만, 당신은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를 보자 갓난아기를 품어주듯 쓰다듬어주고 싶었나 보다. 나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당신을 옆에서 바라만 보았다. 작은 것, 약한 것을 사랑할 줄 아는 당신의 따뜻함이, 내 손을 놓고 다른 것도 사랑할 줄 아는 당신의 손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석양이 지는 모습이 조금 구슬퍼서 그랬던가, 당신의 손이 조금 떨렸기 때문일까, 당신의 눈이 슬퍼 보였다. 풀 한 포기 그 끝에 머물러 있는 이슬이 당신의 눈가에도 고여있었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당신이 좋아하는 아이스 녹차라테를 시킨 뒤 큰 창가 앞에 앉았다. 아직 당신의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또 말없이 석양이 지는 월정리 해변만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당신은 울지 않았고, 하늘은 더욱 붉게 타올랐다.


 "오늘 내게 해 준 일들, 앞으로는 받을 수 없는 것들이잖아요."

 아슬아슬하게 내게만 닿을듯한 목소리로 당신이 말했다. 그 슬픔 어린 단마디는 우리의 이별이 한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신의 말처럼 나는 오늘 해줬던 일 중 그 어느 것도 당신에게 다시는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언젠가 떠나고 마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 기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말은 이별을 암시했고, 그것이 내 피부를 넘어 뼛속까지 파고들자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모든 일이 새롭게 다가왔다.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처음 봤을 때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듯, 당신의 말과 행동, 그 모든 것이 내 착각으로 인해 변질될 뻔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은 언제나 되돌아보게 되는 법이다.

 아마도 당신은 내일 이별이 다가올 것을 알고 어둠뿐인 깊은 밤에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내일이 오지 않길 한없이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결국 지쳐 잠들었을 땐 이미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을 테고, 결국 당신은 집 안에 햇살이 가득 담기고서야 일어났던 것이다.

 또 당신은 이별 앞에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슬픈 추억보다는 행복한 추억이 되고 싶은 것, 우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습으로 남고 싶은 것.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그래서 온종일 표정을 감추었을 것이다. 슬픈 눈을 감추고, 억지로 웃어 보였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못난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 민낯을 가리고 다녔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를 말려주다가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매일 아침 머리를 말릴 때마다 내가 떠오를까, 중간에 헤어드라이기를 뺏어갔겠지.

 고데기를 할 땐 그래도 이 순간이 소중해서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집중하여 당신의 머릿결을 스치는 내 손길에 당신은 자신의 몸에 어떤 흔적이 남아있길 바랐을 것이다.

 카페에서는 내가 백년초 차를 시켜 줌에 고마웠던 것보다 당신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기특해서, 그 마음이 따뜻해서 환하게 웃어주었을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밝게, 그렇게 웃어주었을 것이다.


 고요함을 깨고 흘러들어온 당신의 슬픈 한마디에 흘려버렸던 당신의 행동, 눈빛, 그 모든 것의 감정이 이제야 하나하나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별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고나서야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에게 있어 미련하고 둔한 사람이었다.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알아차려 다행인 걸까?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나는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빼서 든 헤어드라이기, 그 눈빛 속에서 당신이 악물고 있던 그 입술도 쳐다볼 걸, 후회가 남았다.


 당신의 모습이 하나하나 이해되고, 그 감정이 느껴지자 나는 견디기 힘들어 미칠 것만 같았다. 가능하다면 실컷 울어버리고 싶었다. 당신에게 엉겨 붙어 엉엉 울며 가기 싫다고, 가지 말라고, 그 어떤 것도 떠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밤새 울고 싶었다.

 별이 헤어짐을 가엽게 여겨 당신과 나를 이 섬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신에게 무릎 꿇어 가능하다면 내 평생을 신에게 빌 것이고, 저 바다 한가운데 뛰어들어 미친 것처럼 울부짖어서 당신을 곁에 둘 수 있다면 나는 그 바다에 빠져 평생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태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종일 이별을 견뎌내기 위해 참아 온 모든 것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그 슬픈 눈물이 밀려올까 봐, 나는 입을 꾹 닫고, 눈을 꼭 감았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보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뜨자 창가 너머로 엄마와 꼬마 숙녀가 모래사장에 낙서하는 것이 보였다. 그 너머로 밀려오는 파도는 오늘따라 더 구슬프게 우는 것 같았다.


 당신과 나는 카페에서 나와 또 해변가를 걸었다. 태양이 모두 지고 붉게 물든 하늘만이 이곳에도 태양이 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아까 그 꼬마가 낙서하던 곳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써 내려간 낙서 자국을 읽으며 해변을 걸었다. 대부분 누군가의 이름과 이름 사이 하트가 그려져 있거나, 이름과 이름을 품안에 담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하트를 사이에 두거나 커다란 하트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결국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걸음을 멈추고 수많은 낙서 틈에서 당신이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그곳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당신은 한참이나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다짐한 듯 그 낙서 아래에다가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게 무언가 써 내려갔다. 글자가 완성되자 그땐 내가 시간이 멈춰버린 듯 그곳에서 꿈적도 할 수 없었다.

 당신도 나도 이내 참아온 눈물이 볼을 타고 당신이 쓴 글자 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우리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아래 내 이름과 당신의 이름이, 그 이름 사이에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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