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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MIA MADRE)

유언보다 살아온 흔적

각색 (1인칭 시점)


피곤하다.

생각이 다른 동료들과 작업을 같이 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실직자를 소재로 한

의미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다들 무능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카메라감독과 부딪혔다,

블록버스터도 아닌데

자극적 앵글에만 열중하는 게 이해가 안간다.

시위대나 경찰들 얼굴에서

피가 터져야만 속이 시원한 건지.

시나리오 대사는 왜 그리 상투적인가?

‘일자리를 보장하라'라니...

이거 무슨 교과서도 아니고.

‘부끄러운 줄 알라’라고 해야

더 살갑게와닿지 않겠는가.

다들 현실을 책상에서만 배웠나.

배우들은 또 어떠한가,

'인물에 몰입하되 자신을 잃지 말라'는 나의 주문이 그리도 어려운가?

도대체 알아먹질 못한다.

헐리우드 출신이라는 놈은

쉬운 대사마저 까먹길 밥먹듯이다.

도대체 연습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총체적 난국이다.

쉬운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영화를 엎어버릴까?

정말 피곤하다.


남편과 헤어지지 말 걸 그랬나?

새 남자친구는 툭하면 징징댄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와의 미래는 답이 없다.

아무런 열매도 없을 것 같다.

헤어지자 했다.

솔직히 그냥 지겹다.

내게 너무 매달리는 것도 지겹다.

자존심도 없나보다.

우리 딸래미,

오늘도 허락없이 스키장을 갔다.

라틴어 숙제는 언제 하려는 건지...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가

원래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말도 참 안듣는다.

하지만 내가 뭐라 하겠나,

아빠와 멀어지게 한 죄인이 나인 것을...

의사는 이제 준비를 하란다.

심장과 폐가 안좋아서 입원을 시켜드린 건데

이젠 치매증상까지 보이신다.

참 이쁘신 우리 엄마,

라틴어 선생님으로 살았던 우리 엄마,

그런데 이제 몸이 많이 안좋으시다.

매번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시고

좋은 생각만 하시는 우리 엄마,

열심히 간호하지 못해서 조금은 미안하다.

나보다 병원에 자주와서 간호를 하던 친오빠,

오늘 직장을 그만 뒀다.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언젠가 복직을 청원해도

회사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괜히 내가 미안하다.

이혼녀로,

사춘기 자녀의 엄마로,

병든 어머니의 딸로,

무심한 여동생으로,

여류 영화감독으로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좀 버겁다.


오늘은 만들어질 영화에 대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기자가 물었다.

“담기 어려운 주제를 골랐는데...

이 시대의 양심을 대변할 작품이 될까요?”

기다리던, 하지만 뻔한 질문이었다.

나는 “현실 속 영화의 과제”를 떠들었다.

어찌보면 대답도 뻔한 거였다.

난 여태껏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을 고집했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내가 현실의 많은 걸 안다고 여긴다.

그렇다,

적어도 난 문제의식을 갖고 살고싶었다.

철지난 파시즘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보기 싫고,

특권층의 야망도 보기 싫다.

세상은 온통 부조리 투성이고,

대중들은 무식하고...

난 그것을 참기가 힘들다.

그런데...

요샌 이런 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걸 왜 해야하는 건지,

잘 하고 있는 건지,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

현장에서는 촬영이 거듭될수록

화내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왜 그러는지 요샌 나도 잘 모르겠다.

의사는 엄마를 이제 집에 데려가라 한다.

더 이상은 병원에 있어봐야 도움이 안된다며...

엄마는,

어제 병원 정원을 오래도록 걸었단다.

참 좋았더란다.

그리고 밤엔

하늘에 떠있던 달이 너무 아름다웠단다.

딸래미는 병원을 나오면서

할머니가 왜 그런 이상한 말들을 하신 거냐 묻는다.

어쩌면 눈치를 챘을 것이다.

할머니의 병이 점점 악화된다는 것을...

오늘은 엄마가 걷기조차 힘들어 하셨다.

난 "왜 두 세 걸음도 못걸으시냐?"고 짜증을 냈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도 울었다.

둘이 서로를 부둥켜 안고 그렇게 울었다.

뭔가 버겁고 북받치는데

이유를 모르겠고 답답하기만 하다.

복잡한 감정은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걸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펑펑 우는 것으로,

그렇게 스스로를 토하고 서로를 달랬다.


저녁엔 괜시리 전남편이 생각났다.

전화를 해서 좀 보자 했다.


“어머니 아프시다며? 좀 어떠셔?”


“좀 아프신데... 힘 내셔야지.

그나저나 당신은 어떻게 지내?”


“나는 뭐... 말하기 좀 조심스럽네 아직은...”


“뭐가 그리 조심스러울 게 있다고...”


“오늘 왠일이야, 날 왜 불렀어 이시간에?”


“그냥 지나가는 길에...얼굴이나 좀 볼까하고”


“할 말은 없고? 우리 생각은 해본 거 없고?”


“무슨 기대를 하고 그래,

난 영화 만드는 사람이고...

우린 그냥 그렇게 된 거고...

그런 거지 뭐”


“당신은 주위사람들 따윈 신경 안쓰는구나,

아니 의식하지도 못하지.

사람들이 당신을 얼마나 불편해 하는지 모르지?

현장에서도 늘 불만이고 화만 내잖아”


“그건... 내가 일하는 방식이 좀 그래”


“아니, 그건 당신이 사는 방식이 그런 거야”


“.....”



왜 그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만 가느냐,

주변도 좀 바라보고

타인을 좀 더 배려할 순 없느냐...

생각해보니 나를 질책하던 그의 말은

틀린게 하나도 없었다.

친오빠는

자신도 내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말한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긴,

예전엔 누가 그런 얘기를 해도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난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타인들은 날 정말 불편해 하는 건가?

내가 사는 방식이 정말 문제가 있는 건가...


“엄마, 무슨 생각해?


“응? 내일...”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세상엔,

공허한 말들이 너무 많고

껍데기들이 판을 친다.

그 속에서 너무 오래 산 것일까?

엄마의 죽음을 보고 나니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난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공허한 말들을 하면서 살지 않았나,

껍데기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하며 살지 않았나...



오늘,

그 헐리우드 출신배우가

여전히 대사를 버벅거렸다.

그런데 화가 나질 않았다.

딸래미는

내게 라틴어를 왜 배우는 거냐 물었다.

그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냐고...

기자회견에서처럼 나는 뭐라 답을 해줘야 했다.

“음... 사고력을... 길러주고...

글쓰기에도... 여러모로... 좋고...”

마치 내가

그토록 개떡같이 여기던

그 헐리우드 출신배우가 된 것마냥 버벅거렸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딸도 나도 결국 헛웃고 말았다.

며칠 후 딸래미가 촬영장을 왔다.

예전에 내가 배우에게 지시했던

‘인물에 몰입하되 자신을 잃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난 “이제 나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답해줬다.

더 이상

껍데기같은 진부한 표현은 하고싶지 않았다.


기자회견때 떠들었던,

‘현실 속 영화의 과제’는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나?

내가 실직자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고

그들의 복직에 진짜로 도움이 될까?

나도 조만간 병들어 죽을텐데,

그게 현실인데,

내가 뭐하러 이렇게 동료들과 싸우며 살지?

이혼까지 해가면서

제대로 감당도 안되는 난리 부르스에 올인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인가?

나를 자기합리화 속으로 옭아매는

정체불명의 강박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난 왜 엄마처럼

정원을 거닐며 행복해 하지 못하고

하늘의 달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는가...


어머니,

사셨을 적엔 별 말씀 없으시더니

떠나시면서 내게 많은 걸 남겨놓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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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 간만에 난니 모레티의 영화를 꺼내보았다. 가족의 죽음을 다룬 모레티의 영화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미 15년전, 아들의 죽음을 겪는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들의 방 ; La stanza del figlio>… 그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모레티가 최근 어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내놓은 또다른 자전적 스토리, 그게 이 영화다.


모레티는 그의 영화에 자신의 정치적 색채를 자주 투영시킨다, 아니 그가 만든 십수편의 영화 대부분이 자신에 관한 고백록이나 다름없다. <4월>에서는 베를루스코니를 스크린에 담아 대놓고 돌을 던졌으며, 교황을 풍자한 영화도 있고 자신이 영화를 통하여 공산주의자임을 표명한 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그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보다.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사회참여 의식을 담은 데 반해 이번에 내놓은 <나의 어머니>라는 영화는 다분히 정치적 회의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자신의 자전적 스토리라 고백했으니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난 후 자신의 심경변화를 영화로 투영시킨 건 사실일 것이고, 그렇다면 여류 영화감독인 주인공 마르게리타는 성별은 다를 지언정 곧 자신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나름 지식인이라 자부하며 열심히 살아온 주인공, 그녀에게 조용히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놓치고 살아온 것, 소홀히 여겼던 것, 가까이 있었으나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깨달음... 영화는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는 과정과 자신이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렇게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모레티의 영화를 간만에 꺼내든 건, 최근들어 부모의 죽음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생에 한번은 마주해야 할 그날,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구실로 아직 살아계신 부모를 떠올리며 그(들)의 죽음을 짐작하고 감정을 서술하는 건 아무래도 영 못할 짓이다. 더불어 입장이 많이 다른 내가 영화속 주인공인 중년 여성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린 건지 별로 자신도 없다. 다만 막연한 짐작으로 사적인 각색 몇줄을 끄적거려 보았을 뿐이다.


다가올 부모의 죽음에 관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또 이미 하늘에 계신 부모에 관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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