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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전설

La leggenda del pianista sull'oceano

당신을 향한 질문,
"주인공을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



로마 시내 Barberini 광장에 있는 영화관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내 옆에 앉아있던 한 노부인은 결국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눈물을 닦고는 이내 나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감동적이지 않냐 물어보는 듯한 눈빛, 나는 어설픈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게 벌써 몇년전 일이었던가, 난 아직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후 내가 할 일은 DVD를 구입하는 거였다. 나는 오매불망 DVD 출시일을 기다렸고 눈에 보이던 즉시 그놈을 영접했다. 그러나 마음은 간절했으되 가려운 건 영 가지실 않았다. 구입했던 DVD는 이탈리아 판본이었기 때문이다. 한글자막이 없었다는 뜻이다. 한국에 정식발매가 이루어질 지는 알 수 없었으니 가려움을 해소할 방법은 오직 하나, 원작소설을 찾아 읽는 것 뿐이었다. 내 인생에 그 머리 아픈 알파벳 가득한 원작소설을 찾아 읽을 생각을 하다니…

서점에서 찾아낸 그놈은 손바닥만한 크기에 페이지도 70페이지 미만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두눈 질끈 감고 읽어보자 했다. 여차저차 가려움은 그렇게 해소되었다. 참 좋은 영화를 알게됐네, 대단한 소설이네 하며... 그 영화와 나의 스토리는 그렇게 끝을 맺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세월이 흘러흘러 테크놀로지아는 DVD보다 더 좋은 화질과 음질을 수록한 매체를 세상에 등장시켰다. 이름하여 블루레이…

DVD와 똑같이 생긴 디스크에 무려 10여배에 달하는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매체가 등장한 것이다. 한국에 그 영화의 블루레이가 발매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난 물론 화질이나 음질보다 한글자막을 기다리던 중이었고 드디어 그놈마저 손에 쥘 수 있게 됐다. 화려한 재회를 안겨줬던 그놈은 의외의 모습으로 나를 또다시 놀라게 했다. 그건 다름아닌 업그레이드 된 영화본편의 러닝타임이었다. 난 분명 극장에서 그 흔한 2시간정도를 할애했고 DVD를 봤을 때도 동일한 시간이었는데 이게 왠 일, 이놈은 그보다 50여분 가까이 더 긴 본편을 담고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여태껏 접했던 것은 극장용 편집본이었던 것인데 그건 무삭제 원본을 50여분이나 잘라낸 놈이었던 것이다. 감독들은 보통 영화를 제작할 때 2시간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 관객의 몰입도 때문이란다. 2시간을 전후로 지루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영화의 3시간만은 예외였다. 보통 편집본이라 하면 시간상의 문제로 잘라내는 경우도 있지만 스토리 구성에 굳이 필요없는 부분을 잘라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오히려 그 반대에 해당한다. 원본 3시간짜리를 보고 나면 2시간짜리가 얼마나 허접한 편집이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는 반드시 3시간짜리 원본을 봐야 하는 영화이며, 나는 3시간동안 내내 토르나토레와 모리코네의 감성에 경배했고 그렇게 내 인생의 영화목록에 기꺼이 올려놓기로 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이 영화는 한국의 개봉관에서 찬밥신세였다. 메이저급 상영관이 아닌 인디 상영관에 걸려졌으며 그나마도 단기간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한국땅에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을 영화였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입소문 하나로 영화광들을 평정시켰다는 걸… 이런 걸 두고 모래속 진주알이라 한다지.


imdb - 8.1

metacritic - 8.8

다음 - 9.2

네이버 - 9.24

씨네21 - 8.7

왓챠 - 4.1(5점 만점)


물론 영화적 구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평론가들의 점수는 그보다 좀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11개 영화제에서 22개의 상을 수상함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잡설이긴 하지만 예술은 해석하는 자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접했던 단체과 대중들이 이만큼 쌍수를 들어줬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리라. 난 그렇게 믿고 싶다, 적어도 이 영화에 한해서만이라도...

1900년이 시작되던 때, 재즈라는 희안한 장르가 세상에 탄생하던 그때, 당시 유럽에선 경제불황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너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자들도 바다를 건널 이유가 있었다. 꿈의 대형 여객선이 등장한 것이다. 다양한 사회계층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장시간을 공존했으니 많은 사연들을 낳았을 것이다. 이쯤되면 타이타닉이나 마찬가지다. 이 시간과 공간 배경은 이 영화 스토리의 아주 중요한 밑밥이 된다. 어느 날 아메리카로 향하던 이 대형 유람선에 한 갓난아기가 버려진다. 너무 가난해서 애를 키울 능력이 되지 못하는 어느 누군가가 버린 것이다. 아마도 어느 부자라도 자신의 아기를 데려다 금수저 인생으로 만들어 놓길 염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갓난아기를 발견한 사람은 유람선 지하에서 석탄을 다루던 흑인 노동자였다. 출생신고도 할 수 없었던 그 갓난아기의 알 수 없는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기는 배 안에서 꼬마와 소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피아노를 혼자 익혀 천재적 소질을 갖게 되고 퍼스트 클라스 연회장 밴드의 전속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즉흥연주 솜씨는 그 배를 오가던 모든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점차 세상에 알려진다. 문제는 그가 배에서 절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까지도 계속 됐으므로 거의 50여년을 배 안에서만 살았던 거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이제 배는 너무 노쇠하여 파선을 앞두고 있고 배에서 내리기만 하면 그는 세계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부와 명성속에 살게 된다. 그는 배에서 내릴 것인가 아니면 파선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할 것인가...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은 3시간을 아주 유쾌하고 집중력 있게 끌고간다. 아기가 자라는 과정, 단짝친구와의 인연, 연회장 밴드, 재즈 창시자와의 피아노 대결, 사람들의 언행으로부터 영혼까지 맞춰버리는 통찰력, 그리고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남기는 여인 등의 장면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그러다 엔딩에서 관객의 뒤통수를 보란 듯이 후려갈긴다. 그는 결국 내리지 않기를 결정한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겐 이 결말을 미리 언급하는 게 김이 빠지겠지만 천만에 만만에, 이 영화의 정수는 주인공과 친구가 나누는 마지막 10여분의 대화내용이다.

파선 직전의 배에서 요지부동 나오지 않는 이유, 세상의 부와 명예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 그걸 설명하는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설득하여 내리게 하려는 친구 사이에 오가는 일대일 맞대화, 그게 이 영화의 키포인트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면 당신에게 미리 숙제 한가지를 제시해 본다. 당신이 주인공의 친구라면 내리려 하지 않는 그를 어떤 말로 설득하여 내리게 유도 할 것인가 생각해 보시라. 어쩌면 이 문제는 우리들이, 혹은 우리의 아이들이 평생을 품고 가야 할 ‘who am i?’ 혹은 ‘왜 사는가?’의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꿈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무엇이 될 것인가?'의 문제로만 해석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항상 옵션이었다. 보라, 지금의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뉴스들을... '무엇이 될 것인가?'의 문제에만 관심있고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결국 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의 꿈은 더이상 '대통령'이나 '공무원'이나 '법관'이라는 그 '무엇(what)'에 머물면 안된다. 그 자리에서 '어떤(which)' 소신을 갖고 '어떻게(how)' 실천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하여 길거리 부랑자를 보았을 때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사람이(what) 된다"가 아닌 "너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을 어떻게(how)도우며 살 것인지를 고민하라"는 언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 배안의 주인공은 삶의 필요조건으로서의 돈과 명예(what)를 거부한 사람이다. 당신은 어떤 ‘철학적 상위개념’으로 그를 설득하여 배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겠는가, 게 이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아주 진지한 주제의식이다.

주인공은 영화 중간 ‘왜, 왜, 왜, 왜, 왜...?’라는 반복된 독백을 청중들에게 미리 던지고 있고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장면에선 ‘(욕망하는 것의)끝’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정도면 힌트도 대충 알려드렸다. 당신은 이제 그 주인공을 설득할 말들을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준비한 언어로 주인공을 설득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쩌면 신이다.

지난 칼럼 중 이미 ‘말레나(Male’na)’라는 영화로 토르나토레의 감성에 고마움을 표했지만 그의 대표작에 이 영화를 빼놓으면 영 안될 것 같다. 결코 가볍지 않은 철학적 주제를 스토리화 한 것은 원작소설을 집필한 Alessandro Baricco의 공이지만 이 주제의식에 무게를 덜고 채색을 입혀 웃고 울게 한 공은 당연히 토르나토레의 것이며 동시에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모리코네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치 율법처럼 굳어버린 명언,  ‘영화는 원작소설의 감동을 제대로 싣지 못한다’는 그 원작 불변의 법칙 숭배론은 이 두사람 앞에서 아주 보기 좋게 편견으로 전락돼 버린다.


이 영화는 음악을 듣는 재미만으로도 3시간을 꽉 채운다. 필 제대로 받은 난 졸지에 이 영화의 원작소설, 이탈리아 판본 DVD, 한국판본 블루레이, 거기에 OST 음반까지 소유해버린 오타쿠가 되어버렸다. 이탈리아 영화계에 이 두사람이 빠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지구촌 영화계에 이 두사람이 남긴 족적을 일일이 열거해야 할까? 그건 너무 머리 아프기도 하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이 두사람은 그냥 인간의 깊은 감성을 이탈리아의 언어와 배경으로 물감질하여 세상을 흠뻑 적신 사람들이다. 시네마천국으로 부터 이어진 이 두사람의 놀라운 감성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모리코네는 그런데...

올해로 90살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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