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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들이 '행복'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

현자들은 괜히 현자가 아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의 소원은 진짜로 통일일까? 통일은 개뿔, 핸펀을 새것으로 바꾸고 싶고, 핸드백 하나 더 사고 싶고,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고, 자식들에겐 빵빵한 사교육 시키고 싶고... 행여 나의 통장을 마이너스로 만드는 통일이라도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한당을 맹종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기제엔 빼앗기기 싫은 건물주로서의 기득권 같은 것이 있을 터이고 나이들어 가진 게 많아지면서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는 사람들 머릿속에도 쟁취한 물질을 양보하기 싫은 속셈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어면 이 시대의 진보가 싸워야 할 적진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괴물일 지도 모른다. 노인정에서 장기를 두며 말년을 보내는 건 왠지 추해보여 싫고 기사 딸린 중형차 뒷좌석에 앉아 "동해안으로 가주게" 한마디로 공간이동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게 진짜 우리의 소원일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너의 삶의 목적"을 물으면 돈과 명예가 암묵적 공감대이고 설령 조금 고상한 답을 한다 해도 끽해야 '행복'이고 '자아실현'이며 그것도 특별한 규모의 돈과 명예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근데 그게 잘못된 건가? 그럴 리가, 난 그저 미스테리 하나를 풀고 싶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죽었으되 지금의 우리가 '현자'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그 현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가르침이 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진데 우리는 왜 그들을 현자라 추앙하면서도 그들의 말은 징허게 받아들이지 못하가에 관한 미스테리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비종교인의 비율은 인구의 절반정도이고 전세계적으로는 겨우 15% 안팎이란다. 거의 절대적 다수가 의지하는 그 다양한 신들은 현재의 속세민들에게 "돈과 명예를 쌓다 죽으라", 혹은 "그 쌓은 것들을 자식들에게 재투자하고 죽으라"는 유물론을 가르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징하고 줄기차게 물질을 쟁취하고 쌓는 것에 집착한다. 그래, 형이상학적 삶을 실천하는 게 어렵다는 건 나도 이해한다. 그런데 최소한 "꿈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쟁취'의 개념에 그치는 답을 내놓는 건 분명 유감이다. 당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그 현자들과 신들은 죄다 어디로 팔려갔는가 말이다.



당신의 꿈은 인간적인가?


본능이라는 건 그 자체로 죄일 리 없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쟁취하고 싶은 욕망도 죄는 없는 것이고, 쟁취하여 얻은 물질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 또한 죄는 없는 것이다. 쟁취와 대물림의 욕망 또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고 안믿고와는 전혀 상관없이 잘 알려진 진화론자인 도킨스의 유전적 본능을 벗어날 자 누구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나누어라" 하고, 석가모니는 "내려놓아라" 하고, 공자는 "인간답게 살라" 한다. 쟁취나 쌓음은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덕목의 종착역도 아니라는 뜻이다. 본능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종착역이면 동물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건 개돼지 인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랬나보다, 천국에 가는 게 그렇게 어렵다고, 의인은 보기 힘들다고. 그렇다면 인류의 85%에 해당하는 종교인들이 갖고있을 종교적 꿈을 이룰 방법도 아주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구원해 달라 백번 기도할 시간에 나눔을 실천할 구체적 계획을 한번 하는 것이 구원될 확률을 높이는 길이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꿈을 가지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여기서 꿈이란 '쟁취'라는 결과물을 뜻한다. 가령 누군가 나이 40에 꿈을 이루었다 치자. 앞으로 대략 남은 나머지 절반의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이젠 무슨 새로운 꿈을 고민해야 하는 걸까? 그게 문제다. 이루어놓은 걸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40년동안 해 본 일이 없다면 그게 뭐란 말인가? 꿈을 가지라는 잔소리만 들었지 이룬 꿈을 어떻게 활용하라는 가르침은 별로 들어본 일이 없다는 뜻이다. 아 맞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고학력 범법자들이 쎄고 쎈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질만을 꿈꾸고 채우는 것만을 꿈꿨다는 건 무형의 가치를 소홀히 하고 나눔의 가치를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곧, 본능적 욕구만을 채우며 사는 동물과 비슷한 삶을 산 것이다. 나는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살아온 걸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았는가?


예수든 석가든 공자든 피터싱어든, 그들이 남긴 메세지를 가만히 보아하니 대충 이런 거였다 ;   


어리석은 자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을 생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고,

그보다 나은 자는 자아실현 하는 것을 생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으며,

가장 현명한 자는 자아실현으로 이룬 성취물의 나눔을 생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는다.


무슨 뜻이겠는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뜻이다. 누리고 살다 죽는 것만 꿈꾸면 그게 곧 개돼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 "평생 살아도 꿈을 이루기는 커녕 먹고살기 바쁘고 노후 준비하는 것도 벅차다"고... 그래 맞다. 그래도 우리는 선택이라는 걸 해야 한다. 학교는 줄을 세우고 이기라 하고 더불어 가야함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들의 다음 세대에게 건물주가 되는 법 외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엄마와 아들이 길을 가다 거지를 보았다. 엄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그러나 또다른 엄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들 돕고 살아야 된다"




새해가 다가오니 괜시리 착한 놈 되어 그럴싸한 선비질이다. 며칠 못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욕망덩어리로 되돌아오겠지만...







- Addio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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