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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자연이다

다윈에 관한 오해

그의 인생마저 자연의 선택이었다


진화론의 거장인 다윈의 인생 중 초기 20년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가 후에 진화론자가 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그가 진화론자로, 그것도 세상에 우뚝 선 원탑 진화론자로 이름을 남겼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말이다. 사람의 인생은 역시 아무도 모른다. 살다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변화무쌍한 현실과 욕망의 함수관계를 누가 감히 예측이나 한단 말인가.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던 그 변화무쌍한 현실 중 하나는 다름아닌 여행이었다. 남미 갈라파고스에서의 5년, 어쩌면 그가 그렇게 감명깊게 읽었다던 ‘자연신학’의 감동을 현실에서 느끼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이나 적어도 그 어떤 지적설계자의 기적을 확인하고 싶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서식하 잡다한 생명체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전통적 창조론의 기적을 그저 ‘확인’하고 싶었던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의심’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7월 10일자, jtbc의 방송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한 장대익 교수의 강의 내용에 따르면…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적 형질은 변화하는 환경에 살아남은 개체들의 번식의 결과물’

이라는 결론, 즉, 개체들이 어떠한 욕망을 추구하여 얻은 걸 대물림 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자연환경에 부합하지 못하는 개체들은 멸종되어 사라지고 부합하는 개체만 살아남아 그 형질대로 번식한다는 것이다.

가령, 나뭇잎과 똑같이 생긴 날개를 가진 여치는 살아남기 위해 위장술을 터득한 게 아니라 나뭇잎의 생김새와 거리가 먼 날개를 가진 여치들일 수록 쉽게 잡아먹혀 그 개체수가 줄어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점점 나뭇잎과 비슷한 날개를 가진 여치끼리 번식을 하다보니 결국 지금의 여치가 남게 됐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전통사회에 반역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담과 하와가 존재했고 수많은 동물들도 태초부터 이미 지금의 모습에서 출발했으며 생명체의 서열마저 논했던 기존의 종교관념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곳의 나뭇잎을 따먹으려 안간힘을 쓰다보니 기린의 목이 길어졌다고 알고있던 내가 진화론에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그때 알았다. 즉, 현재의 생명체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 자연환경에 의해 선택된 유전적 형질의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각 생명체들이 자연을 선택하거나 애써 적응하려 노력한 게 아니라 자연이 생명체들을 선택하고 변화하게 한다는 것, 그게 다윈 이론의 핵심이었다.


나는 어찌보면 신선할 것 없는 이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면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지구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는 각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유전적 형질을 가지는 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흰곰들이 멸종하듯 자연환경이 변하는대로 개체의 유전적 형질이 변하는 것, 그게 생태계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 부른다.


'진화(Revolution)'론은 틀렸다.


장대익씨의 강의에서 또다른 중요한 것을 알았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 속 내용에는 '진화(Revolution)'라는 단어 대신 ‘Descent with modification (변화를 동반한 계통)’이라 표현했단다. 우리는 보통 ‘진화’라 하면 ‘진보’나 ‘전진’처럼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걸 상상한다. 그런데 다윈은 그가 생명체들의 변화를 두고 더 나아지는 과정이라 하지 않았다. 이건 앞에서 언급한 기린의 예와 통한다. 기린의 노력에 의해서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에 적합한 쪽으로 변화할 뿐이다. 즉, 기린의 목이 길어지는 건 더 나아지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자연이 그렇게 몰고갔기 때문인 것이다. 빙하가 녹으면 백곰은 줄어들고 갈색곰이 늘어나는데 그걸 ‘나아진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적자생존’이라는 단어의 창시자였던 스펜서 이후, 아니 그 이전 무수한 역사속에서 인간은 종족의 우월함이라는 이념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시켰다. 이건 다윈의 진화론 ‘자연선택설’에도 어긋나는 이념이다. 자연 그대로를, 다양성과 있는 그대로를 인정치 아니하고 어떤 게 더 우월하다는 개념은 이렇게 비극을 만든다. 그런데 이런 비극은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인종차별 직업차별 나이차별… 이런 모든 그릇된 갑질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치 아니하고 ‘너보단 내가 나아’라는 적자생존식 논리임이 분명하다. 사람은 그들 사이에 우월이 있을 수 없고 심지어 원숭이도 사람보다 못한 동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도 원숭이도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인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자연선택설’은 우리가 왜 존재하며 왜 이처럼 행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기막힌 이론이다.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류를 언급하며 진화론과 존재의 의미를 논한다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다윈의 이론을 제대로만 알았더라도 어쩌면 왜 사는가를 두고 정처없이 방황했던 과거의 긴 시간들을 줄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적자생존과 학군선택설을 가르치는 공교육 시스템에서 다윈의 진화론 ‘자연선택설’이 이제라도 더더욱 빛을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족,

다윈의 이론이 아무리 논리정연하다 한들 창조론이 틀렸다는 결론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윈은 겨우 지구촌 생명체들을 설명할 뿐, 온 우주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론도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올곧이 반박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 드넓고 머나먼 세상의 진리를 생명나무 줄기의 끝자락에 있는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경외로운 심정으로 어느 한가지를 믿고 싶을 뿐일지도 모 일...

나는 여전히 창조론자도 진화론자도 아닌, 그저 불가지론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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