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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Martin Eden)

이념과 욕망의 딜레마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를 물으면 답은 대개 도긴개긴이다. 의식을 하든 안하든,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본능을 만족시키는 바로 그 순간 행복이라는 걸 느낀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은 아주 간단한 것이 된다. 그저 본능을 충족시키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맘대로 안된다. 먹고 싶은 걸 먹자고 남의 것을 훔쳐 먹으면 안되고 성욕을 채우자고 아무나 붙잡을 수도 없다. 그건 야생이다. 인간이 야생을 거부하고 문명이라는 시스템을 굳이 창조한 이유는 나의 욕망뿐만 아니라 타인의 욕망마저도 고려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다. 안그러면 생사를 걸고 매일 피터지게 싸우게 될테니까, 그게 야생이니까… 문명의 역사가 길어질 수록 이념이 복잡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문명의 형태는 변화하기 마련이고 변하는 문명의 형태는 새로운 이념을 요구한다. 인간이 동물처럼 본능만을 쫒아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이념이라는 걸 얼마나 고민해야 하는가?

이념을 고민하다 가령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다보면 허망해지기 쉽상이다. 우리는 살면서 식욕, 배설욕, 성욕 등의 본능으로부터 벗어수 없으며 이 모든 본능의 최종목적은 '유전자의 자기복제'에 있다는 그 이론, 수천년을 고민했던 인간들의 '존재론'을 비웃듯, 그 내용의 골자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다. 물론 도킨스가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우리네 삶은 본능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을 해야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자유의지는 후에 ‘이념’이라는 걸 탄생시켰다. 이념은 자주 본능과 대치된다. 그래도 한번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설왕설래, 이념의 목적은 어쩌면 ‘행복한 사회 만들기’ 아니겠나. 그런데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만든 이념들의 대립은 역설적이게도 싸움과 전쟁의 불씨가 된다. 이념이란 건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지구촌에 떠도는(떠돌았던) 이념의 갯수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재미있는 건 그 수많은 이념 가운데 어느 한가지만 골라서 그게 가장 나은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그리하여 이념은 곧 신념으로 굳는다. 그리곤 이렇게 자족한다, ‘나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려 보자. “신념을 소유한 당신, 그 신념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혹시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왜 신념을 고집하는가? 당신이 원했던 건 행복한 삶 아니었나?”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영화의 주인공 마틴 에덴이 생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 답을 했을까? 어쩌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행복과 신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는 내 자신의 비겁함이 너무 괴롭다”라고...

고화질 전쟁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스리, 영화의 시작부터 아날로그 필름의 질감이 가득하다.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촌놈이 누군가에 의해 문자에 눈을 뜨고 사회에 눈을 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게 되는 이야기라고. 순간 유사한 플롯이면서 내 인생영화가 된 '일 포스티노(Il Postino)'가 생각났다. 그런데 영화시작 30분쯤 지나면서 '일 포스티노'의 소박한 감동은 머릿속에서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포스티노'와는 달리 초반의 로맨스조차 장난기 하나 없이 뭔가 단물 빠지고 거친 느낌, "아, 이래서 아날로그 필름을 사용한 건가" 싶었다. 원작 소설과는 달리 공간배경을 나폴리로 삼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로 담은 나폴리라면 작렬하는 태양과 바다를 중심으로 한 낙천적 시민들의 노래와 해학이 가득해야 마땅하리라. 허나 영화는 생생하고 역동적이고 가벼운 나폴리가 아닌, 부와 가난의 갈등, 우울과 심각한 느낌의, 그것도 1900년대 중반 언저리의 나폴리를 필요로 했고 아날로그 필름은 그에 부합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나를 몰입하게 했던 이유, 나도 한 때 세상에 눈을 떴을 무렵엔 지나간 나의 시간들에 대한 배신감과 사회의 부도덕성에 대한 분노가 뒤엉켜 감정과잉에 사로잡혔던 시절이 있었다. 공교육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에 눈을 뜨는 과정, 내겐 감당키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하물며 주인공은 문맹자였으니 오죽했겠는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전쟁을 치루던 당시 아나키즘이나 개인주의의 향기를 풍기던 보들레르나 스팬서의 책들을 접하며 천둥과 같은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겪는 주인공을 지켜보며 나의 과거가 중첩되어 저절로 몰입이 되었다. 세상에 눈을 뜨는 과정은 둘 중 하나다. 아주 신비롭고 재미있거나 아주 고통스럽거나…

주인공에게는 사랑도 출세도 모두 고통스런 사건들이다. 삐뚤어진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고통인데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건 위선적인 자기 자신을 마주할 때이다. 그는 상류층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계급상승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고, 계급이 다른 두 여자 사이에서도 갈팡질팡 한다. 내가 스스로 대면하기 싫어했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내 불편했다. 그와 내가 달랐던 지점은, 나의 자유의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걸 선택했고 그의 자유의지는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

영화 후반부에 분장한 그의 죽음을 예고한 쾡한 눈을 보면서 나도 예전에 저랬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이를 한살 두살 더 먹을 수록 도킨스의 존재론은 더 살갑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위한 삶을 살 뿐인 것을…’ 그리곤 “나의 신념(혹은 추구하는 이념)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미련한 질문을 자꾸 하게 된다.


내리막을 걷고 있는 이탈리아 경제에 상응하듯 이탈리아 영화계도 갈수록 우울하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었다던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영화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메말라 가는 이탈리아 영화계에 단비같은 영화가 나온 것 같아 반가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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