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의 작품 세계: 모노하와 이우환.
국제갤러리 이우환 개인전 《Lee Ufan》 방문하기 전에 읽어두면 좋은 글.
오늘은 꼭 이우환의 전시가 가고 싶어서 예약창을 열어보았는데 이게 웬걸 계속되는 오류로 인해 예약 자체가 접근 불가능 했다. 결국 갤러리 측에 전화를 걸어 여쭤보니, 이미 5월 말까지 모든 회차 전시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관람을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우환의 국제 갤러리 개인전 포스터. 전시는 5월 28일까지 진행된다.
코로나 3년 동안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다. 리움의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그렇고, 이번 국제 갤러리 이우환의 전시도 그렇고 인기가 너무 많다보니, 전시 자체에 접근이 어려운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전시를 다녀왔다는 것이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따라서 인기 전시 인증 게시물은 또다른 수요를 유발하고, 결국 전시를 방문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렵게 되는 듯 보인다.
'이 가볍고 유동적인 시대에 하루 이틀 감상하고 SNS에 묻혀버릴 인생샷 찍으려고 전시장 가면 안 된다.' 라는 따분한 이야기를 하고자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필자가 전시에 방문하지 못하니 전시 예매에 성공한 이들의 감상에 도움이 되는 글이라도 쓰고자 하는 것이다. 티켓팅에 성공한 이들은 귀하게 얻은 기회인 만큼 작가에 대한 사전 조사 정도는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글이다. 그들이 보다 흥미롭게 전시를 관람하도록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이우환은 1960-70년대 활발했던 '모노하 운동'을 전 세계로 확장한 주요 인물로 꼽힌다. 이우환이 속해있던 이 '모노하 미술가들'은 ‘만들지 않는 미술’을 시도한 젊은이들이었다. 모노하는 '물건'을 뜻하는 일본어 '모노'와 '그룹'을 뜻하는 '하'의 합성어로, 국내에서는 ‘모노하’, ‘물파’ 혹은 ‘모노파’ 등의 다양한 단어들로 불린다. 이들이 등장한 1960년대는 미술계 곳곳에서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저항이 곳곳에서 시작되던 때였고, 모노하 작가들은 작품에 대한 미술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사상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돌, 유리판, 솜, 각목 등 사물 그대로를 전시 공간에 가져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배치하는 방식을 택하여 모더니즘 미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 모더니즘 미술이란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는, 의식 대상에 대한 의식 주체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미술이었다. 근대주의적 사고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관점에 맞춰 타자를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주체의 이성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되는 모더니즘 미술이란 미술가 자아를 재생산하는 미술이자, 미술가 자아를 되비추고, 미술가의 시선이 투영되는 미술이다. 이렇듯 미술가 중심적인 작업은 대상이 그것 자체로서 있음을 묵살하고, 사물 각자의 고유한 존재적 위상을 부정한다. 이 맥락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가는 자신의 의식에 근거하여 타인이나 사물을 대상화하기에 이들의 폭력적 시선은 작품 세계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모노하 작가들은 모더니즘 작가들과 달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배치하고자 하였다. 작품에 대한 권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한 것이다. 그들은 자연물이나 공업용 재료를 가능한 있는 그대로 제시하여 사물을 사물 이상의 무언가 다른 것으로 경험하도록 하였다. 작가들이 날 것의 사물을 전시장에 낯설게 배치하기 시작하자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자들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낯선 사물과의 특별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사물은 제 ‘기능’을 다하는 맥락에서 떼어져 나와, 그저 전시 공간에 ‘놓여 있는’ 작품이 되었다. 따라서 작품이 놓여있는 공간이란 어떤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상태에서 사물과 인간이 조우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학에서 모노하에 대하여 공부할 당시 처음 만났던 이우환의 작업은 ‘관계항’이었다. 돌과 철판히 나란하게 놓여 있는 작업은 아마 이우환의 회화 다음으로 유명한 작업이 아닐까 한다. 미술관에 맥락 없이 등장한 돌이나, 아무 설명 없이 놓여있기만 한 철판의 모습이 조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관계항 시리즈는 꽤 다양했다. 자연석이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거나, 커다란 자연석을 유리 위에 놓아 깨어진 자국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작업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작품에 놓인 사물들이 그저 서로 조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계항>에서는 관람자가 주체가 되고, 작품이 객체가 되는 고압적인, 혹은 위계가 분명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람자는 이미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사물들과 어우러지며 주체도 객체도 아닌, 그저 만남의 장에 포섭된 자로서 그곳에 공존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관계항> 의 만남이란 관람자 - 작품 이라는 이원론적이고 분명한 위계를 가지는 만남이 아니다. 되려 그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그저 한 공간에 공존하는 만남이다. 이우환에게 '장소'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이렇듯 여러 주체가 공존하며 조우하는 공간이다.
이우환의 회화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얹고자 하지 않았다. 물감에 개입되는 자아를 최소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캔버스나 붓, 그리고 물감이나 작가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개개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을 가능한 존중하고자 하였다. 캔버스나 물감은 그림을 그리는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그림의 일부이자 하나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초기 그는 캔버스를 하나의 작업으로 만들거나, 마티에르의 고유함이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우환의 작업 세계에서는 작가의 개입이 최소화되고, 작업에 연계된 모든 존재들이 대등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의 작업이 놓인 자리에서 우리는 사물과, 함께 관람하는 이들과 그저 공존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의 개념을 가지고 세계를 객관화하거나 식민화하기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우환의 작업은 타인을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한 개인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 관점 속에서 함부로 규정하고자 하는 시대에 대하여 사유하게 한다. 지난 코로나 3년 타인은 잠재적인 보균자이자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되었다. 매일 같이 개개인의 신념을 추적하여 그에 맞는 정보만을 제공하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기술 덕분에 인간의 생각은 점차 편협해져 가는 듯 보인다. 반목이나 혐오는 일상화되고, 사람들은 타인과 사회에 대하여 깊은 피로감을 느낀다. 타인과 있는 그대로의 공존을 두려워하는 시대, 그리고 그에 따라 깊은 심리적인 공허감을 느끼는 시대에 이우환의 '만남'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한다. 지금 이 시대에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꽤나 자명하지 않을까.
* 사진 출처
구겐하임 웹사이트
http://web.guggenheim.org/exhibitions/leeufan/series/mono-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