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 서울 미술관 ⟪요시다 유니, Alchemy⟫ 전
지난봄 부암동에 다녀왔다. 봄이 한창 무른 익어 여름의 푸르름이 곳곳에서 눈에 띄던 날이었다. 서울은 동네 특유의 향과 멋이 사라지고 있는 모를 정도로 비슷해져 가고 있는데, 부암동은 여전히 세월의 흔적을 곳곳에 머금도 있는 동네였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차로도 그렇다고 대중교통으로도 가기 불편한 부암동에 들른 이유는 요시다 유니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평소 인스타그램을 통해 요시다의 작업들을 흥미롭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해외 첫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전시장이 여유로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조금 더워질 무렵 방문한 것이었다.
⟪요시다 유니, Alchemy⟫
석파정 서울 미술관 2023.05.24-2023.09.24
요시다 유니 전시는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더라도 누구나 편안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전시다.
요시다 유니의 전시가 특별한 만한 이유를 꼽으라면 단연 탄복할 만한 창의성이 1순위일 것이다. 그녀는 음식을 큐브 형태로 조각조각 잘라 ‘음식 모자이크’를 선보이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지는 튤립 꽃과 줄기로 옷핀을 형상화한다. 75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패션 잡지를 차례로 책장에 늘어뜨려 고혹적인 여성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파인애플과 오이와 같은 야채로 위트 넘치는 하이힐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을 곱씹어 볼수록, 그녀의 작업들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단순히 그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CG나 포토샵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얼마든지 생산해 낼 수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AI를 이용하면 단지 몇 초 만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 수 있는 이때에 아주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손수 구현하고자 한다.
그녀의 작업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녀의 작업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구현한 ‘창조’와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킹 영상을 보면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는 고도로 정교하고 지난한 작업들을 작가가 현장에서 직접 실현해 내는 장면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전시장 곳곳에는 실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까지 사용된 재료들 실물이나 사진을 감상할 수 있는 구간도 있는데, 그곳을 가만히 지나다 보면 실물 작업보다도 작업 노트나 사용된 재료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긴 역사를 지나며 인간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사회를 구성하는 건강한 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여정은 아무리 다채로운 기술들이 고도로 발달한다 해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성장의 과정은 결코 축약되지도 않는다. 아이들과 청년들, 그리고 장년들까지 인간이란 각 연령에 맞는 발달 과업을 직접 밟아가며 지나야 한다. 경제는 압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해도, 인간은 압축 성장이 불가능하다. 양육자가 삶을 갈아 넣는 수고를 하지 않는 한 그리고 마주해야 할 문제를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한, 인간들은 연령보다 낮은 단계에 고착되거나 어딘가 고장 난 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간은 성장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책임감, 타인과의 정서적 친밀감, 나약함에 대한 인정 등, 성장하는 인간이라면 멈추지 않고 삶 전반에 걸쳐 배워야 하는 덕목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에 대하여 인지하고, 출력해 내고, 인정하고, 이후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들은 스크린을 이용하여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된 지금도,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직접 겪고 지나야 지나야 하는 과정들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여전히 인간만 할 수 있는 고유한 일들에 대한 경이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요시다의 전시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계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기계는 수작업의 자리를 대체해 왔음에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손으로 만드는 작업을 선호한다. 무엇 하나 그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실제 촬영이 이울어지기까지 요시다는 모든 과정에 손을 뻗친다. 결과물에는 손으로 만든 따뜻함과 인간 특유의 섬세함이 녹아 있다. 그리고 기계가 살릴 수 없는 아주 미묘한 디테일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녀의 작업은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요시다의 이미지는 아무리 많은 것들이 기계에 의하여 대체된다 하더라도, 결국은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성의 영역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요시다는 그 영역으로 구현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선보이며,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의 지난함과 고유함을 동시에 생각해 보게 한다.
때로는 고통과 노력을 수반할지라도, 한 인간이 인간이 되어가는 것에는 그만한 경이와 위엄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삶과 긴밀히 닮아 있다는 것, 그것은 그녀의 작업에 대한 여운이 가시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