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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Jun 17. 2023

사소한 개인이 위대한 인간으로: ⟪제이알 크로니클스⟫

롯데 뮤지엄에서 열린 JR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한동안 아우슈비츠 생존들의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인류에게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 살아남은 이들이 어떻게 주어진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경이로울 뿐이었다.


나치의 입장에서는 비슷한 생김새에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이 그저 한 무더기의 유대인 '집단'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들 각 개인은 그들만의 기질과 성격을 가지고 나름의 삶의 역사를 기록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들이 었을 것이다. 수용소에서, 혹은 가스실에서 죽었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배경의 가정에서 태어난,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고유한 개개인들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대인 수감자들의 모습


그러나 사람을 한 명의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개인으로 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한 걸음 물러나서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가장 쉽게 택하는 방식은 집단에 대한 편견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종으로, 성별로, 혹은 직업과 나이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아주 간편한 키워드들에 의존하여 사람을 지레짐작하는 일 만큼 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뉴욕을 여행할 때만 해도,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흑인들을 무의식 중에 두려운 존재로 읽어내던 기억이 난다. 상대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운 공간에 머물기 때문이었을까. 브루클린 브릿지 위를 걸으며 만난 이슬람 남성들은 극단주의자로, 히잡을 쓰고 있는 여성들은 문화적 요구에 순응하는 시대에 뒤쳐진 이들로, 동남아시아인들이나 히스패닉 이민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정도로 쉬이 치부했던 기억이 난다.


한 사람을 고유한 개인으로, 그리고 독특한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데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 분명 사람은 가까이서 볼수록 다르고 특유한 존재임에도, 우리는 개개인을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한 개인으로 사유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포스터의 사진.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서.


그러나 예술가 JR은 사람을 '집단'으로 읽어내는 우리의 한계를 보다 예술적으로 보완한다.


그의 예술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각각의 이야를 가진 위대한 개인이 된다. 그리고 이미지 앞에 선 우리는 그 '개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2017년 부터 그의 작업을 꾸준히 지켜보았는데, 드디어 국내에서 그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얼리버드 예매가 오픈되자 마자 티켓을 샀다. 누구든 좋으니 JR을 소개시켜줄 요량으로 두 매를 구매했고, 오픈 날 맞춰서 전시장을 찾았다.



예술가 JR의 모습과 그가 촬영한 사진들.






자유로운 예술가, JR



프랑스 출신 J은 열 일곱살 부터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갤러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도시의 벽들이지요." 이라며, 도시의 공간을 자신의 개인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배포 넘치는 행보를 보였다. 그에게 화이트큐브라는 작고 권위적인 공간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거리로 나가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그들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빚어내기 시작했다.


* 2005 파리 소요 사태.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2005년 10월 파리에서 일어난 파리 소요사태 부터 시작되었다. 파리 소요 사태란 2005년 10월 클리시수부아에 살던 세 명의 십대 소년이 경찰의 추격을 피해 변전소에 들어갔다가 두 명이 감전되어 사망하고 한 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 사건을 의미한다. 소년들은 그날 축구 경기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으며, 마침 경찰관 두 명이 순찰차를 타고 소년들 주위를 지나가던 중, 소년들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경찰차를 보고 도망치자, 경찰과의 추격적인 벌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파리 소요 사태가 일어난 지역에서. 제이알과 동료들의 작업. 그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들 개개인에 주목한다.


JR은 이 소요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던 지역을 찾아가 가까이서 젊은 청년들의 모습을 직접 담아내기 시작한다. JR은 기성 미디어 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들의 이미지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들 개개인에 주목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담아낸 사람들은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것 같은 공격적인 범죄자의 형상 보다는 익살스럽고 친근한 이웃의 모습에 가깝다.


작가는 거리에서 쉬이 만날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 만으로 잠재적인 위협을 담보하고 있는 인물들로 읽힌다는 지점을 포착한다.



파리 소요 사태 당시의 작업들을 다룬 '세대의 초상' 파트에서 가장 강렬한 한 장의 사진을 꼽으라면, 아마 주저없이 <브라카쥐, 래드 리>를 말할 것이다. 사진은 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흑인의 이미지 같으나, 사실상 이 사진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영화 감독 래드 리이다. 작가는 거리에서 쉬이 만날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 만으로 잠재적인 위협을 담보하고 있는 인물들로 읽힌다는 지점을 포착한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은 미디어의 편향된, 자극적으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이 사람의 생각과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 2008년, 여성은 영웅이다



2008년 부터 2010년까지 JR은 캄보디아, 인도, 케냐, 라이베리아, 시에아리온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여성은 영웅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도시들의 교집합은 무엇일까. 북미나 서유럽 같이 여성의 인권이 발달한 나라들이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JR은 가정폭력이나 강간, 아동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적법한 제재를 받지 못하는 지역을 방문하여 개개인의 여성들을 촬영하고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한다.



그가 케냐를 방문할 당시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지역, 나이로비 근처 '키베라'를 방문한다.


28 Millimètres, Women Are Heroes, Action in Kibera Slum, Train Passage 5, Kenya, 2009 Ⓒ JR


키베라는 아프리카 최대의 도시 슬럼가다. 대개의 슬럼이 그렇듯 전기와 물이 들어오지 않고, 경찰 역시 공격 받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다. 키베라와 맞닿은 장벽 너머로는 신식 아파트 건물들이 세워져 있으나, 그곳에는 케냐의 정부 고위 관료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그곳은 더욱이 아프리카 빈부격차의 극명한 대비를 반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에이즈에 걸린 이들이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이 지역은 나이로비 사는 영국인들이나 다른 유럽인들이, 빈민이자 노동자들이었던 지역 주민들을 정책적으로 분리하여 거주하도록 만들며 형성된 지역이라고 한다. 키베라는 식민주의의 역사 속에서 정부의 정책에 따라 슬럼화가 시작된 곳인 것이다.



28 Millimètres, Women Are Heroes, Action in Kibera Slum, General View, Kenya, 2009 Ⓒ JR



JR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키베라를 방문하여 이곳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영위하고 이웃 사회를 단결하는 개개의 존엄한 존재임을 시사한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사회 구조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문명화되거나 발달되지 못한 문화 속에서 더욱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JR은 그들을 피해집단으로 재현하기 보다는 사회가 유지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존엄한 존재로서 담아내고자 한다.



그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익살스러운 모습들을 사진으로 재현하였다. 지역 여성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들은 비를 막을 수 있는 방수 비닐 위에 인쇄되었다. 따라서 개개 여성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웃음기 가득한 코와 입은 비를 막아 건물의 부식을 지연하는 방수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의 사진은 여성들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그리고 한 가정을 존속하도록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별 전시 이후 그는 기차와 선로 아래 붙였던 사진들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1년 후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주민들이 방수천을 가정용 카펫과 같이 나름의 방식으로 일상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유명한' 사람, 혹은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이 예술적 재현의 대상이 될만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JR은 특정 장소를 살아가는, 그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 개개인에 집중한다. 그리고 각자의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의 주체들을 사진에 담아낸다. 그렇게 인쇄한 사진들을 거리에, 건물에 붙인다.


JR의 전시를 둘러보다보면 세계 다양한 곳에 존재하는 개개의 존재들과 그들의 살아온 역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몇몇의 지인들에 의하여만 기억되는 아주 사소한 존재들이 마치 위대한 역사의 일부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전시를 보고 나면 사람이 궁금해진다. 오늘 이 지하철에서 마주친 이 사람들을 잠재적 보균자나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며 거리를 두던 마음이 사그라든다. 그리고 각 사람이 자신의 터전에서 살아내며 빚어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지게 된다.


갈수록 사진이 가벼워지는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JR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사진은 여전히 사람의 살아온 역사를 담아내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예술적 수단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담아낸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롯데뮤지엄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전시는 8월 6일까지 계속된다.


*JR의 테드 강연 영상.




*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



사실 JR을 처음 알게 된 건 2018년 개봉한 이 영화 덕분이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당시 80세가 넘은 영화감독 아네스 바르다와 삼십대 초반의 젊고 활기 넘치는 사진 작가 JR의 로드 무비이다. 그들은 포토 트럭을 몰고 프랑스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의 모습을 찍고, 지역 곳곳에 설치하였다. 그와 사람들이 교감하는 모습도 좋지만, 자신의 얼굴이 건물 전면에 붙은 것을 본 순간의 사람들의 얼굴이 피어오른 감격이나 프랑스 시골의 소박한 풍경 하나하나가 특히 마음에 남는 영화였다. JR의 예술적 행보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도 추천한다.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8.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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