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크루거 개인전,《Forever》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정치적인 작품이 화이트 큐브를 만날 때.

by 정미

“굳이 내가 아니어도”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굳이 내가 소개하지 않더라도 작가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현대 미술가이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이하 APMA)은 이미 수많은 계열사를 가진 대기업 ‘아모레’ 소유의 화려한 현대 미술관임에 틀림없다. 전시를 홍보하는 무수한 포스팅과 SNS게시글들은 굳이 이 전시에 대해 나도 말해야 하나. 라는 의문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시에 대한 단상을 짧게나마 나누어보고자 한다.


전시 포스터.jpg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바바라 크루거 개인전 ,《Forever》의 전시 포스터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를 처음 만나 것은 ‘여성미술사’ 수업에서였다. 학풍의 영향일까, 필자가 공부했던 대학에서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학자들의 업적을 괄시하는 학문적 풍토에 대해 꽤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 학자들과 그들의 역사에 관한 수업이 자주 열리곤 했는데, 바바라 크루거는 그렇게 열렸던 수업을 청강하던 중 만나게 된 작가였다. 그녀는 미국의 1세대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현재는 현대 미술계의 거장으로 꼽힐 정도로 현대 미술계에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권력의 문제, 즉 젠더, 인종, 계급의 문제에 천착한 다양한 작업들을 이미지와 글귀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선보여왔다.


책으로만 혹은 ppt자료들로만 만났던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들이 무려 ‘개인전’을 위하여 한국 땅을 밟았다. APMA는 첫 돌을 축하하는 전시의 작가로 바바라 크루거를 택했다. 2019년 6월 27일부터 시작되는 바바라 크루거의 개인전 《BARBARA KRUGER: FOREVER》는 올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말까지 아모레의 신사옥에서 개최된다. 강남역 사건 이후 한반도를 뒤엎은 ‘페미니즘’의 물결과 이후 물밀듯이 쏟아진 페미니즘 마케팅들을 고려한다면, 바바라 크루거를 첫 전시의 작가로 꼽은 것은 APMA의 꽤나 전략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 전시는 크루거의 치열하고 날이 선 정치성이 미술관과 만날 때 어떤 아이러니를 생성하는지를 보여준다. APMA가 야심차게 준비한 크루거의 개인전은 정치적인 작업들이 “화이트 큐브”(White Cube), 즉 시각적으로 주의를 흩트릴만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 고결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만날 때, 그들에는 어떤 변형이 가해지게 되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바바라크루거 1.png 바바라 크루거, <Untitled(Forever)>, 2017, print on vinyl wallpaper.

화이트 큐브는 정치성을 중화한다. 아니, 거세한다. 그래서일까. 전시는 미진했고, 미술관에서 걸려있는 크루거의 작업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작품이 놓여있던 일상의 맥락과 철저히 분리된 곳에 놓여있는 크루거의 작품은 그저 글자를 나열하거나 이미지를 제시하는 개념미술 작품 정도로 다가왔다. 전시장에 발을 디디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Untitled(Forever)>(2017)는 그 거대한 규모로 미술관을 찾아온 관객들을 압도하였으나 번역되지 않은 메시지는 많은 관람자들에게는 뜻 없는 기표로만 비춰질 뿐이다. 크루거는 버지니아 울프와 조지오웰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대한 활자들로 광활한 공간을 메웠으나, 영어로 쓰여진 글귀들이 많은 관람객들에게는 어떤 울림도 주지 못했을 수 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Untitled(Forever)>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기 급급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크루거의 개인전 홍보를 위한 거대한 포토존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긴 어려운 듯 했다.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자.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미지로 꼽을 수 있는 <Untitled (Your body is a battleground)>는 당시의 여성주의자들이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투쟁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근 낙태를 둘러싼 여성들의 투쟁이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주된 큰 이슈로 부상하는 것을 지켜보며, <Untitled (Your body is a battleground)>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한층 더 또렷하게 울려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작품을 찾았다. 그러나 전시장의 깨끗한 벽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 작품은 미술사 책에서 보았던 익숙한 이미지를 실물로 확인하는 정도의 인상만 주었을 뿐, 현재에 대하여 어떤 것도 발화하지 않는 듯했다. 이미 작품의 이미지를 디지털화된 이미지로 많이 접해서 진품의 아우라가 사라진 것인지, 혹은 기업의 미술관이라는 특성상 전시에 그녀의 정치적인 메시지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겨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지들을 중화한 방식으로 큐레이팅을 꾀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크루거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 받았던 역동적이고 활력있는 메시지를 이 전시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바바라크루거 battlefield.png 바바라 크루거, Untitled (Your body is a battleground), 1989, photographic silkscreen on vinyl,


크루거는 여전히 자본주의, 가부장제 등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측면을 냉소와 풍자로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크루거의 뜨거운 비판 의식은 “화이트 큐브”를 표방하는 차가운 미술관을 만남과 동시에 식어버린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그럼에도 미국의 페미니즘 투쟁의 숨결,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녀의 작품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일 것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주말,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화이트큐브

'화이트 큐브'(White Cube)로 불리는 전시 방식은 예술비평가인 브라이언 오 도허티(Brian O' Doherty, 1928 - )가 1976년 <하얀 입방체 내부에서 (Inside the White Cube)>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하나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도허티의 의하면 화이트 큐브적 공간은 교회가 지닌 신성성, 법정이 지닌 형식성, 실험실에서 풍기는 신비성이 시각화된 이데올로기적 장소를 가리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허티의 화이트 큐브 개념은 흰 벽으로 이루어진 입방체의 근대 전시장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하얀색의 사용은 나치즘이 만연하던 1930년대 독일 미술관이 표준 벽 색깔을 '순수한 색'으로 일컬어지는 '하얀색'으로 설정한 것과도 연관이 됩니다.)


화이트 큐브는 미술관 공간을 신성화 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회 체제에 순응하는 경직되고 세속적 장소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그 결과 화이트 큐브의 경직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적 미술과 그 맥락을 함께 합니다. 화이트 큐브 미술관 안에서 예술작품의 소통 방식에 한계를 느낀 예술가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이 전시에서 크루거의 작품은 "흰 색" 벽에 걸리지 않았으나, 작품이 본래 존재하던 일상의 맥락과 분리되어 외부 공간과의 뚜렷한 간극을 가진다는 점에서 '화이트 큐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화이트 큐브'와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좋은 글을 첨부해봅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685889&memberNo=85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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