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림희영, <Song from Plastic> , 2022.
12월 초는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다. 16강이라는 1%의 기적을 이뤄내고 온 후 찾아온 감동과 열광은 4년에 한 번만 맛볼 수 있는 짜릿한 뜨거움이 아닐까 싶다.
2002년 월드컵을 생생하게 겪은 세대로서, Be the reds 티셔츠나 피버노바 축구공은 당시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존재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윤도현 밴드의 '오 필승 코리아'는 당시 반 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월드컵에 대한 열기를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일종의 '추억 버튼'이 된다. 오 필승 코리아가 재생되는 순간, 20년이란 세월의 길이도 무색하게, 당시의 환호성과 기쁨과 기대감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4강 신화를 이루었던 어린 주역들이 벌써 우리나라 축구계 곳곳에서 젊은 선수들을 감독하는 위치에 있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 역시 서른이 되었는데도 후렴구 한 소절에 여전히 그 시절이 선명해진다. '소리'라는 것은 세월과 상관없이 우리 마음 깊이 새겨진 기억들을 꺼내는데 탁월한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아니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어떤 소리로 기억될까.
며칠 전 수업하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 잠시 들러, 요즘 작가들의 재미난 작업들을 구경하고 왔다.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에서는 지난 9월 말부터 시작된 새로운 현대미술 프로젝트 ‘에이피 맵’(apmap)의 여덟 번째 《apmap 2022 seoul - apmap review》가 한창이었다. 전시는 동시대의 최전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진 22팀의 다채로운 작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각, 설치, 미디어, 사운드, 건축 등 다양한 장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환경 이슈, 역사, AI와 인간 등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들을 탁월한 예술적 안목으로 풀어낸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길을 끄는 작업이 있었는데, 전시장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우주+림희영의 <Song from Plastic> 시리즈이다. 우주+림희영은 우주와 림희영으로 구성된 팀으로, 2004년부터 지금까지 키네틱 조각, 드로잉, 실시간 인터랙티브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을 이용하여 사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친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특별히 기계와 일상 사물의 예기치 않은 결합 속에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형성하는 작업들이 눈에 띄는 작가들이었다.
우주+림희영, <Song from Plastic>, 2022.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우주+림희영의 <Song from Plastic> 역시 일상적인 사물들과 축음기의 결합 속에 독특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작업이다.
AP MAP의 전시장으로 걸어 들어가면, 일상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다양한 플라스틱 사물들이 전시장 벽면에 화려히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각각의 사물들은 소리가 기록된 LP 판의 역할을 한다.
사물들은 원래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미술관에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현대 미술 작업이 되었다. 쓰레기들은 일종의 신분 상승을 경험한 듯 보여 흥미롭다.
이 플라스틱 쓰레기에는 아이들의 목소리, 흥겨운 노랫소리, 그리고 일상에서 들리는 소리가 기록되어 있다. 작가들은 우리 일상에서 소소하게 발견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소리들에 초점을 맞췄다. 이 소리들은 쉽게 잊히고 기억에서 휘발될 만큼 흔하지만,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고유한 소리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그리고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이 소리들은 에디슨의 틴포일 실린더 축음기 (Tin Foil Phonograp)로 재생이 된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이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지극히 평범하나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지니는 의미, 혹은 인간다움이 나타내는 흔적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업에 따르면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로 그 해답이 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 이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장 '우리 다움'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역설이다. 그러나 지금 이보다 더 우리의 삶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요소가 있을까.
우주+림희영은 이 플라스틱 쓰레기에 2022년을 살아가는 삶의 소리를 담아냈다. 먼 훗날 오늘을 떠올리기 위하여 이 소리를 들어볼 수 있도록. 3040세대에게 '오 필승 코리아' 노래가 수행하는 역할과 같이, 이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동일한 역할을 해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