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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Apr 06. 2020

소설 속으로 떠난 기차를 찾아서

독일



바람이 불었다. 숲은 수북한 체모를 날리며 웅웅거렸다. 나는 호프굿스터넨 인근 숲속을 두 시간째 걷고 있다. 햇빛 한 자락도 들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이곳은 독일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우리 말로 '검은 숲'이다. 한 시간은 더 걸어야 기차역이 나올 것이다. 키 큰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빼곡한 틈새로 뻐꾸기가 울었다. 뻐꾸기는 파수꾼이다. 낯선 사람이 등장하면 '꾸욱 꾹' 소리를 내어 숲속 이웃에게 경계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뒤통수가 가려웠다. 숲의 정령마저 숨죽인 채 나를 지켜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무심한 척 걸었다.



게르만을 넘보던 로마군대는 토이토부르크(Teutoburg) 숲에서 3개 군단 2만5천 명이 궤멸당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 너머로 들어가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뻐꾸기 소리는 듣는 사람을 구슬프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겨울이면 폭설이 내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이곳. 겨울내내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뻐꾸기를 다듬으며 기차가 다니길 기다렸다. 그렇게 뻐꾸기 시계가 이곳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나는 시계의 정교함이나 유래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눈을 뒤집어쓴 채 산등성이를 돌아 나오는 기차나, 그 기차가 잠깐 멈춘 역 풍경 같은 것을 자꾸 상상했다. 그게 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때문이었다. 오래전 소설을 읽은 후 나는 줄곧 이 글이 독일 남부 검은 숲에서 출발하여 북쪽 발틱 해에 인접한 폴란드와의 국경 어디쯤으로 가는 기차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소설에선 검은 숲의 'ㄱ' 자도 나오지 않지만 이번 여행에서 기차역을 꼭 찾아보겠다는 다짐까지 하고 말았다.


슈바르츠발트는 독일의 중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다. 숲은 해발 700m~1500m 높이에 폭 60km 넓이로 아래쪽 스위스 국경까지 160km나 뻗어 있다. 숲은 제 품 슈투트가르트, 바덴바덴, 프라이부르크처럼 크기가 고만고만한 도시와 부피가 작은 호수, 더 낮은 밀도의 마을을 안고 있다. 남쪽 숲은 '호흐 슈바르츠발트'(Hoch Schwarzwald)라 부른다. 호흐(hoch)는 우리말 '호호 할머니'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냥 '높다'라는 뜻이다. 이 말이 붙으면 유별나게 가파른 산길이거나 또는 깊은 협곡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다니기가 만만치 않다. 여길 넘나들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그 요량으로 생긴 마을이 호프굿스터넨이다. 1300년부터 마구간과 여관이 들어섰으니 마을은 역사가 700년이 훌쩍 넘었다.



호프굿 스터넨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 슈바르츠발도프. 왼쪽 간판 아랫부분을 보면 구츠빌러 가문 소유라는 표시가 있다.


1770년에는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가 이곳에 나타났다.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다. 화려한 마차 52대가 멈춰 여장을 수습하는 게 장관이었다고 한다. 나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 '슈바르츠발도프'(Schwarzwaldhof)에 머물기로 했다. 꼬리에 붙은 호프(hof)란 말은 집이란 뜻으로 지은 지 110년 된 가족호텔이다. 귀가 어두운 안 주인, '그레타'(Greta) 할머니는 늘 손걸레를 들고 다니며 주변을 훔쳤다. 이른 아침부터 식당에 내려와 아무나 눈 맞추고 이런저런 말을 거들었다. 그날이 마침 90세 생신이라 했다. 내가 곰스크로 가는 기차역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 아침이.


곰스크(Gomsk).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곳은 소설 속 주인공이 어려서부터 꿈꾸던 이상의 도시였다. 아버지 무릎에 앉아 도시 이름을 처음 들은 남자는 그때부터 이야기 속, 그곳을 언젠가 꼭 찾아가리라 동경하며 자랐다. 청년이 된 남자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타면서 소설이 시작한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하자 남편과 달리 아내가 불안해한다. "우리는 익숙한 곳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어쩌면 이 여행은 끝이 없을지도 몰라요. 곰스크에 대해 아는 게 더 있나요?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 말고요." 라면서.



기차는 서는 역마다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고 또 새로운 것을 붙여 길을 떠난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떼어내고 또 무엇을 새로 얻는지를.


다음 날 기차는 몬트하임이란 간이역에 멈췄다. 아내는 바람이라도 쐴 겸 잠깐 마을을 돌아보자고 졸랐다.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시간 여유도 있었다. 남자는 아내와 함께 마을을 걸어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올랐다. 마침 해가 지고 있어 빨갛고 노란 저녁노을을 구경하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늦장을 부려 그만 곰스크행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딱한 부부는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기차를 타기 위해 역 근처에 머물 곳을 구했다. 남자는 주인집에 일손을 거들면서도 여차하면 떠날 수 있도록 짐을 풀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마치 눌러살 것처럼 온 집안을 쓸고 닦았다. 가방에 든 옷가지를 꺼내 장롱에 차곡차곡 개켜 넣더니 급기야 '안락의자'를 사 와 곧 떠날 집에 들여놓았다.


기다리던 곰스크행 기차가 들어왔다. 남자는 손에 잡히는 짐만 들고 부리나케 역으로 뛰어가는데 뒤따르던 아내가 팔을 잡으며 말한다. 새로 산 안락의자를 싣고 가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남자는 기차를 꼭 타야 했다. 그럼 자기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후 연락하겠다고 했다. 아내가 대답했다. "네. 그럼 머무는 곳을 알려주세요. 뱃속의 아이도 태어나는 대로 그 주소로 보낼 게요."라고.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자는 곰스크로 떠날 수 있을까. 이야기의 결말은 소설을 읽을 사람을 위해 남겨둬야겠다. 한마디만 더 쓴다면 책의 말미에 등장한 늙은 교사가 던진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고, 그 운명은 자신을 고른 사람을 따라간다. 당신이 어떻게 살았던 결국 그게 당신이 선택한 삶이다." 라는.



책은 2010년에야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 그전까진 하이텔 같은 PC통신에서나 구할 수있었다. 책엔 프리츠 오트만의 단편 8편이 전부다. 그는 독일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92년 봄, 서울 청운중학교 교생 실습실은 오슬오슬 추웠다. 서강대 4학년 안광복은 곱은 손을 호호 불며 독일어 사전을 뒤적거렸다. 송요섭 교수의 <중급 독문강독>을 수강하던 그는 교생실습을 나오느라 중간고사를 치르지 못했다. 송 교수는 시험을 면제해주는 대신 교재로 쓰던 단편을 번역해서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과제로 하는 번역은 재미없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는 번역에 빠져들었다. 쉽고 아름다운 문장. 가슴을 아리게 하는 감미로움. 번역은 어느덧 과제를 넘어서 버렸다. 교생실습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뒤에도 번역은 계속되었다. 스물세 살 젊은이의 치기도 한몫했다. 글을 번역해서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단편은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Fritz Ohrtmann)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Reise nach Gomsk)였다. 그렇게 소설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후 하이텔 같은 PC통신에서 독일 소설 매니아들 사이를 알음알음 돌아다녔다.


나는 이 짧은 글을 군대에서 처음 읽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을지로 독일문화학원에서 학원강사를 하다 입대한 까마득한 졸병 녀석이 A4 용지에 빽빽하게 출력한 20 페이지 분량의 프린트물을 내게 줬다. 뭣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외출금지령이 내린 지 한 달이 넘어가던 늦가을이었다. 군대에 이런 녀석이 한 명씩 있기 마련인데, 아침부터 성당에 다녀오겠다고 하도 죽을상을 짓길래 안 보내주면 탈영이라도 할 거 같아 내가 데리고 부대 정문을 통과시켜줬더니 이걸 불쑥 꺼냈다는 말이다. 뭐라도 주고 싶은 거였겠지. 부대 앞 제과점에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노닥거리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만 내용에 빠지고 말았다. 이윽고 '당신의 지금은 스스로가 선택한 운명'이란 문장에 이르러서는 죽비로 등짝을 세게 얻어맞는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나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바로 유학을 떠나고 싶은 생각과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소설은 나에게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곰스크행 기차를 영영 놓칠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하마터면 그 날 오후, 녀석이 아닌 내가 탈영할 뻔했었다. 길가 담벼락에 핀 코스모스에 내리꽂히던 가을 햇살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틀림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오누이는 길을 찾지 못했다. 밤새도록 걷고 이튿날도 꼬박 걸었지만 숲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헨델과 그레텔>에서


호프굿스터넨은 천천히 쇠락했다. 1857년 도로가 새로 놓이면서 마을은 길목 장사를 영영 멈췄다.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건재했다. 마차 대신 자동차가 지나고 장사꾼 대신 등산객이 찾아왔다. 마을 뒤편 산 중턱으로 길이 224m 높이 36m의 아치형 철길이 놓였다. 그 위로 빨간 기차가 달렸다. 프라이부르크와 티티제(Titisee)를 연결하는 기차다. 호텔에서 곰스크행 기차 타는 곳을 묻는 나에게 그레타 할머니가 대뜸 알려준 곳이 바로 티티제 역이었다. 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할머니는 영어를 알기는커녕 가는귀를 먹었지만 내 말을 나름 짐작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곳 당연히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티제의 ''(see)는 '호수'라는 뜻이다. 나는 호수를 크게 돌아 반나절을 걸어서 기차역에 도착했다. 걷는 내내 1세기경 이곳으로 진출하려던 로마 군인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이곳을 음으로 '검은 숲'이라 불렀다고 한다. 쓰러진 나뭇등걸을 지날 때는 '헨델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헨델이 떨어트린 빵조각처럼 누군가 돌 표식을 만들어 놓았다. 바람에 나무가 서걱 여기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존재에 관해 끊임없이 되물 하이데거를 생각했다. 그는 질문이야말로 대답에 이르는 길이라 믿었다. 문득 는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이곳은 곰스크였을까 아니면 간이역이었을까.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사평역에서>


간이역에 주저앉았다고 해서 의미 없는 삶이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간이역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테니까. "그럼 나는 곰스크로 떠나긴 했을까?" 이번엔 내게 질문했다. 그리고 대답대신 슬픈 미소를 지었다. 서른이 넘어 나는 에든버러, 밴쿠버, 뉴욕으로 주소를 옮겼다. 그들은 몬트하임보다 크고, 곰스크보다 구체적이었다. 살림은 또 얼마나 나아졌는지. 하지만 새벽이면 곰스크행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득달같이 달려오곤 했다. 그래도 떠나지 못한 건 사랑이나 미련이 저지른 짓들 때문이리라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휑한 가슴을 뚫고 달아났다. 티티제까지 따라온 뻐꾸기가 그동안 낯이 익었는지 무어라 자꾸 말을 붙였다. 하지만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인적 없는 기차역에 혼자 도착한 불면의 새벽 뒤척이만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도록 만지작거렸다. 


"네 인생의 곰스크행 기차를 탈 것인가 아니면 몬트하임의 안락한 의자에 머무를 것인가. 언제나 그것이 문제로다."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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