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해 Jul 12. 2021

하이라인 씨어터의 '후미등'

뉴욕 맨해튼



사람들은 뉴욕 화를 한다. 걸 제대로 즐기려면 떠도는 이야기 뒤편을 들여다봐야 한다. 멀쩡한 공원과 도로, 녹슨 다리와 철길은 인쇄된 텍스트에 불과하다. 보이는 것만으로 행간을 짐작하긴 어렵기 마련. 외국인인 나는 더했다. 간유리 넘어 경처럼 모호했다. 텍스트가 아닌 이야기. 그것도 원래 색갈이 남아있는 흔적을 보고 싶은 날 때마다 탐색자를 자처했다. 50층 이상 건물이 100개가 넘는 뉴욕은 거리마다 땅거미도 길고 사연도 짙었다.


기시감과 낯섦이 뒤섞인 맨해튼. 나는 목에 배 온한 공기를 호흡하며 햇볕에 드러난 얼굴과 그림자에 가린 민낯을 리저 뒤적거렸다. 운이 좋아 퍼즐이 맞으면 도시는 천연스레 숨겨놨던 정체를 드러다. 거기에  줄기 스토리라도 건져내면 아아, 그때의 소스라침이란. 나는 그만 하염없어지고 만다. 오늘도 그런 심정하이라인을 찾았다. 가만가만 숨죽이며 드려 있는 뉴욕 폐 철길 이야기를 들여다봐야겠기에.



마차와 자동차로 뒤엉킨 1800년대 10번 애비뉴는 사고가 안나면 이상할 정도. 시속 6마일로 달리는 화물 열차 앞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말탄 사내가 붉은 깃발을 흔들어댔다.


이곳은 170년 전, 1847년에 노면 철도가 놓였더랬다. 맨해튼 남서쪽 미트패 지역에 보관하던 유제품 포장육 따위를 도심으로 운송하기 위해서였다. 남북으로 뻗은 10번 애비뉴는 그 때도 벌써 복잡한 길이었다. 원래 다니던 마차, 보행자, 자전거, 자동차에 새롭게 화물 열차까지 더해지자 인명 사고가 잇달았다.


철도가 놓이고 약 10년 동안 물경 540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애비뉴'(Death Avenue)라고까지 불렸다니 말 다 했다. 고심 끝에 시 당국은 1933년 3층 높이 기둥을 줄지어 박고, 그 걸 다리삼아 고가 철도를 놓았다. 나비스코, 아머 미트패커, 맨해튼냉장 같은 창고형 회사는 건물 2-3층을 열차가 들락거리며 화물을 싣고 내리도록 했다. 맨해튼의 건물 무릎높이를 들고나는 하이라인 기차는 SF소설에나 나옴직풍경 만들었다. 뉴욕이 런던을 제치고 세상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도시가 이었다.



30피트(9미터) 높이의 기둥을 박아 만든 하이라인 고가 철도. 나비스코 건물을 뚫고 통과하는 당시 하이라인 철길.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때는 미 전역을 트럭 운송이 거미줄처럼 연결하던 무렵. 철도 안 그래도 천천히 쇠퇴하던 중이었다. 뉴욕도 비켜갈 순 없었다. 1960년대 초반, 출발점인 스프링 스트리트에서 뱅크 스트리트 구간의 고가 철도가 철거됐다. 1980년 가을에는 추수감사절 식탁에 올릴 세 화차 분량의 냉동 칠면조 고기를 마지막으로 하이라인 철도 운송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20년, 고가 철도는 쓰레기와 잡초로 뒤덮인 채 나 몰라라 방치되었다.



Gansevroot Street의 하이라인 파크가 시작하는 지점. 기둥 사이로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간다. 공짜라서 매표소 따윈 없다.


하이라인의 부활은 드라마틱했다. 1999년 뉴욕 시장 줄리아니는 '깨진 유리창'이 범죄를 부추긴다며 흉물스러운 고가 철도를 걷어내자는 주민 공청회를 열었다. 안 그래도 주변 땅을 가진 지역 유지의 개발 민원에 시달리던 터였다. 그러나 공청회에 참석한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조슈아 데이비드와 로버트 해먼드. 그들폐 철도를 냥 부술 게 아니라 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믿었다. 시민 단체 '프렌즈 오브 하이라인'(FoHL)이 결성됐다. 이들은 시 당국과 지루한 협상과 설득 끝에 2009년 마침내 폭 12m, 높이 9m, 길이 2300m에 이르는 폐 철길을 보행자전용 공중 산책로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가장 신경 쓴 게 푹신한 바닥재와 한쪽이 허공에 뜬 벤치이다. 그래서인지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여기까가 공식 스토리다. 다른 얘기는 없을까. 나는 이야기 뒤편을 들춰보았다. 사실 버려진 하이라인은 어두운 폐 철길에서  도착자 마약을 일삼는 공간이기도 했다. 첼시 지역은 예전부터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게토' 였으니까. 조슈아와 로버트는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정화시켜 되살리고자 했던 게이 운동가였다. 두 사람은 뉴욕 정재계에 소리 없이 포진했던 성 소수자(LGBTQIA) 최대한 끌어들였다.


조슈아는 대놓고 말했다. "하이라인에 녹아 있는 퀴어함(Queerness)과 게이성(Gayness)은 우리의 과거를 추억하고 앞으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고. 여기서 그 생각을 헤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만은 여타 공원과 다른 점은 분명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건물 사이를 지나는 첼시 구간. 나중에 허드슨 강과 나란히 달리는 구간보다 더 정겹다.


하이라인에는 가로등이 없다. 고가 철도 시절에도 3층 높이이다 보니 거리 불빛이 아예 닿지 않았다. 생긴 화초나 특별한 나무도 없다. 모두가 폐 철길에서 막 자라던 식물, 500 가지이다. 그들은  100마일 이내에서 오기 때문에 환경 적응 이미 끝낸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버지니아 블루벨, 여우꼬리 백합, 방울뱀 마스터, 버지니아 로즈, 그레이 버치 등등.


이들은 한쪽에서 훌쩍 키를 넘는 군락을 이루는가 하면 조용히 흩어져서 제 각각 피고 진다.  자기들만의 계획이 있는 다. 보행자를 위해선 발목 높이에서 낮은 조도로 켜지는 조명이 전부다. 자전거나 킥보드도 다니지 못한다. 산책로가 건물을 통과하지만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직통 출입구는 없다. 10여 개의 계단은 모두 도로로 내려간다. 이게 퀴어함과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내 눈엔 감수성, 배려, 평등, 자유로움 따위로 읽혔다.



'10번 애비뉴 스퀘어' 외부 모습. 누구라도 세 칸짜리 통창 뒤  나무의자에 앉아 어두워지는 거리를 관객의 시선으로 내려다봐야 한다.


독특한 건 하이라인에서 경험하는 '3층 높이 시선' 이다. 마치 영화 고담 시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또는 거미줄을 잡고 건물사이를 나는 스파이더맨이 된 듯하달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새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감(鳥瞰)과는 다르다. 허드슨강 너머 뉴저지 호보켄(Hoboken)에서 맨해튼 전체를 한눈에 담는 넓은 조망(眺望) 더욱 아니다. 어릴 적 동생을 업은 엄마 손에 끌려 잰걸음으로 따라 걷다 제풀에 그만 코를 박 엄마의 두툼한 허리. 딱 그 느낌으로 건물이 시야를 막아선다.


하이라인에선 건물이 그렇게 닷없이 눈앞에 등장한다는 말이다. 하이라인이 건물 허리께에  돌아가는 구간 도치 않누군가의 일상을 훔쳐보 다. 내려다보이는 건물 이층 스튜디오에서 광고 촬영 중인 금발 모델 벗은 상반신며, 단층 건물 지붕고단한 빨래까지. 대형 입간판을 들고 버티는 낮은 건물 옥탑의 각진 철 구조물 것조차   한. 이런 풍경 사이를 람들은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보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걸을 뿐이다.



황혼이 내려앉는 '10번가 광장 조망대'(10th Avenue Square & Overlook). 발아래로 10번 가를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방통행 차량들이 지나간다.


이윽고 도착한 나의  장소. 10번 애비뉴와 17번 스트리트가 만나는 상공, SNS에서 '10번가 전망대'(10th Avenue Square & Overlook)라고 부르는 곳이다. 여기는 두 갈래로 나뉜 폐 철나가 별안간 끊어진다. 끊어진 곳 정면 대형 유리 통창으로 막고, 앞에다 긴 나무 의자를 계단식으로 놓았다. 누구라도 의자에 앉아 영화 보듯 통창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게 설계했다. 나는 이곳을 '하이라인 씨어터'라 이름 지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발아래 10번 애비뉴는 정지 신호에 멈춰 선 차량 행렬로 빽빽했다. 공교롭게 일방통행 길이라 모두 브레이크를 밟아 붉은 후미등이 들어왔다. 느릿느릿 꼬리를 물고 피곤하게 움직이는 자동차 브레이크등이 맥처럼 꾸불꾸불 긴 줄을 이은 모습. 거기엔 앞선 차량의 후미등만 보고 불투명한 인생 항로를 따라왔던 내 모습이 있었다. 삶에 발뒤꿈치를 물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달려왔던.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미등을 밝힌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작가가 되고 만다.


꽉 막힌 맨해튼의 퇴근길. 각해 보니 내 삶도 저렇게 정체되었다. 앞으론 더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영화의 엔딩 장면처럼 수많은 후미등이 전망대의 전면 유리창을 붉게 물들였다. 발밑은 어둠이 점령했. 통창으로 보는 거리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서 소리가 소거된 채 나오는 연합뉴스 화면 같았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 붙다. 차가웠다. 어른대는 미등은 하나같이 순종적이다. 조용히 앞차가 움직이길 기다릴 뿐. 


그건 나도 그랬다. 갈수록 수동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다. 끈에 묶인 채 터지기 직전까지 불어놓은 풍선 같. 쳇바퀴 같은 구도에서 벗어나려면 진작 뺐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다른 들도 다음 신호에 자의 정체 구간을 벗어날 불확실지고 말았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도로는 꽉 막혀있지만 해변으로가는 반대편 도로는 뻥 뚫려있다. 금이라도 비상등을 깜박이고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해야 까. 그러기엔 용기도 준비도 이 부족. 나는 어두워진 하이라인 씨어터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일어설 때까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혼자 앉아있었다.



인간의 두 개의 창을 통해 자신을 본다. 하나는 거울, 다른 하나는 창문. 창은 바깥 풍경에 스민 나를 비춘다. 세상 많은 것들과 연결된 관계 속의 나를.


한편으론 딴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다른 사람의 등짝이 아닐까 하는.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닮고 싶은 선배. 그들이 내게 보여주는 따뜻한 후미등. 그걸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방향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만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고가 철로 옆 입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그곳엔 병목 구간을 전하게 통과하 안내 문구 쓰여 있었다. 통창으로 바라보는 문장은 엔딩 크레딧박힌 영화 주인공의 쓸쓸한 고백 같았다. 노란 스크린을   줄. 것은 삶의 어느 구간에서 이 더뎌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는 말이었. 로 같도 하고 운명 같기도 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도시의 광고판은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



"차를 움직이는 건 엔진이 아니라 차의 후미등다. 그게 당신을 디든 데려 테니." 

(Not the engine that moves the car, but the tail lights that will lead you anywhere.)







posted by chi













LGBTQIA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intersex, asexual




매거진의 이전글 쩜뿌 한번 해줄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