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주차는 어떻게, 잘 됐어요?"
내 손에 들린 자동차 키를 보고 눈썰미 좋은 닥터 한이 아는 척을 했다. 맨해튼 현철수 소화기내과에서 독립하여 자기 이름을 건 병원을 차린 지 6개월여. 그녀는 내가 서울에서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걸 어디서 들었는지 여간 곰살맞지 않다.
그 친절이 사실은 발 빠른 C가 새로 오픈한 이곳을 직원들의 체크업 병원으로 지정했기 때문임을 안다. 그걸 두고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C가 닥터 한에게 귀띔을 해놓은 게 분명했다. 마치 내가 다 도와준 것처럼 알라고.
맨해튼으로 차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자기가 부자든가 아니면 다니는 회사가 돈이 많든가. 터널이나 다리에서 톨비로 15불, 오늘내일 시행한다는 혼잡 통행료 11불 거기다 주차료까지 40~50불을 내면 한번 들어오는데 거의 10만 원을 길바닥에 뿌려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42가 포트 오쏘리티에서 뉴저지를 오가는 직행버스를 타지만 늦은 저녁 식사 약속이 있거나 다른 계획이 잡히면 꼼짝없이 차를 끌고 와야 했다.
"건물 입구 키 큰 가로등 밑이 비었길래 거기다 세웠어요."
내 대답에 주사실로 들어가던 닥터 한이 주춤 걸음을 멈췄다.
"아 비숍요. 이번 매거진에 가로등 얘기가 실렸는데 꼭 읽어보셔야 해요."
그녀는 벽에 붙은 서가에서 잡지 한 권을 꺼내 들고 눈을 찡긋하며 내밀었다. 민망한 나는 얼른 책을 받아 들었다. 리셉션 여직원의 갸우뚱하는 시선을 무시하며 GQ 책갈피를 휘리릭 넘겼다. 완전 뉴욕 특집이었다. 플랫 아이언 건물을 양면 펼침으로 도배한 첫 페이지. 근데 내 눈엔 도비라 사진의 귀퉁이에 한 쪽 등만 켜진 가로등 모습이 딱 눈에 들어왔다. 그건 '5번가의 불침번'이라 불리는 트윈 포스트 가로등이었다. 뉴욕의 가로등을 포착하고, 또 그걸 소개하는 매거진이라니. 나는 옛 연인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듯 반갑고 소중한 기분에 가지런히 책을 무릎에 놓았다.
전 세계 가로등 수가 3억 2천만 개가 된다고 한다. 그중에 33만 개가 뉴욕에 있다고. 뉴요커들은 가로등을 스트리트 라이트라고 부르지만 나는 꼭 램프포스트라고 말했다. 그러면 폼이 더 나는 듯했다. 뉴욕랜드마크 보존위원회에 따르면 뉴욕엔 열세 가지 모양의 가로등이 세워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게 가톨릭주교 지팡이 모양을 본뜬 '비숍의 굽은 지팡이'(Bishop's Crook Lamppost)다. 에디슨 컴퍼니의 중역, 리처드 보우키(Richard Bowke)가 처음 만들었다는데 나오자마자 뉴욕의 명물이 됐다. 지금은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에 제법 남아있다. 그게 미드타운 이 건물 앞에도 있어 좀 전에 거기다 용케 파킹을 한 것이다. 어렸을 때 자전거를 전봇대에 기대 놓곤 했는데 그 때문인지 자동차도 기둥 가까이 세우면 맘이 편했다.
페이지를 더 넘기자 짧은 글 하나가 따라 나왔다. 《뉴욕에서 주차하기》란 제목의 단편이었다. "음 가로등과 주차라." 뉴욕의 병원 대기실에서 영어로 쓴 단편을 읽으려는 게 어쭙잖았지만 뭐 달리 할 것도 없어 눈길 가는 대로 내버려뒀다. 분량이 짧고 소재가 내 취향이기도 해서 시선이 한달음에 주욱 아래로 내려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글을 쓴 에프라임 키숀(Ephraim Kishon)은 헝가리의 유명한 작가였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매거진의 페이지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잡고선 연거푸 사진을 찍었다. 이따가 텍스트로 전환해서 천천히 다시 읽어볼 작정이었다. 처음 몇 줄만 읽었는데도 닥터 한 말마따나 뉴욕의 풍경을 어찌나 잘 표현했는지 '이건 소장각이야' 싶어서였다. 뉴욕의 가로등과 주차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여름 뉴욕에 사는 숙모 트루데를 방문했을 때였다. 나는 극심한 욱신거림 때문에 이른 잠을 깼다. 오른쪽 턱밑을 물어뜯는 아주 유난스러운 치통이었다. 나는 숙모에게 근처에 쉽게 갈만한 치과가 있는지 물었다. 숙모는 가까운 거리의 치과 세 군데를 알려 주었는데 뉴욕에서 가깝다고 함은 25킬로까지는 수긍해야하는 거리였다. 세 곳 중 어디가 가장 괜찮으냐니까 숙모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 달라. 첫 번째는 휘트먼 상가에 있는 건데, 거긴 아무한테나 말 거는 보호자들로 붐비는 곳이야. 네가 치통에 시달리면서 그 등쌀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번짼 여기서 한 번에 가는 버스 노선이 있어. 그러나 그렇게 친절하진 않거든."
"그래서 블루멘펠트 박사를 추천하고 싶구나. 병원이 단독 주택단지에 있고, 주차장 찾기가 쉽다는 신문 광고를 내는 사람이지."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오른쪽 뺨은 심하게 부풀어 올랐고, 되도록 빨리 진찰을 받고 싶었다. 나는 삼촌의 포드를 빌려 곧장 단독 주택단지로 출발했다. 블루멘펠트 박사의 치과는 금방 찾았다. 그런데 숙모 말과는 달리 주차하기가 마땅찮았다. 갓길은 이미 차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는 주변을 빙빙 돌며 세울만한 곳을 찾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주차된 차 문을 열려고 만지작거리는 게 아닌가. 나는 재빨리 그 옆으로 포드를 몰고 가 유리창을 둘둘 내리고 물어봤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뭐라고요? 내가 떠난다고요. 절대 아녜요. 내가 이 자리를 잡는 데 3년을 기다렸어요. 작년 가을, 거주지 우선주차 계도기간에 겨우 하나 얻어냈지요."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그 차도 뽀얗게 먼지가 덮여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걸로 봐서 여기서 떠나는 차를 만날 가능성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아무렴 그가 나보다 여기 사정을 더 잘 알겠지' 하는 마음에 어디를 가야 주차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주차할 데요? 그건 나도 몰라요. 여기서 30킬로 안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을걸요. 운이 좋으면 나처럼 몇 년만 기다리면 되고요."
그는 차 트렁크를 쾅 눌러 닫고는 문을 잠그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치통이 더 심해졌다. 더 이상 주차 공간을 찾으려고 애쓰는 건 어리석은 일 같았다. 보이는 거라곤 빽빽하게 주차된 차이거나 <주차 금지> 간판뿐이었으니까. 또 몇 바퀴를 돈 끝에 이번에야말로 행운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건물 앞 텅 빈 터에 <고객용 주차장> 이라는 간판이 걸린 곳을 발견하였다. 나는 재빨리 포드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따라오더니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둘러보니 거긴 보험 대리점 사무실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가 인사를 하며 내 안색을 살폈다.
"얼마나 오래 주차하실 건데요?"
"네, 한 시간 반쯤요."
이빨이 아파 이젠 대답하는 것도 힘들었다. 노련한 보험 설계사는 손가락으로 서류를 뒤적이더니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1만 달러짜리 풀 커버리지 보험에 가입하시면 됩니다. 무료 견인까지 포함해서요"
나는 차가 아직 보험 만기가 남아 있어 갱신할 때 살펴볼 테니 지금은 견적만 받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모두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저희는 선생님 사정을 다 들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나 역시 이렇게 비싼 보험을 이중으로 가입할 순 없어요."
"그럼 선생님, 당장 차를 빼셔야 합니다."
"네, 그럴게요."
그 후 계속 근처를 배회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차 연료통에 남은 기름이 간당간당했다. 길가 ESSO에서 휘발유를 넣으며 화장실을 쓸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주유소 화장실은 좁은 통로 끝, 꽉 막힌 곳에 있었다. 심지어 창문도 없어, 눈에 띄지 않게 밖으로 튈 방법이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절망적으로 물었다.
"주유 말고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뉴욕 양키즈 모자를 쓴 ESSO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일 교환에 10분 걸립니다. 엔진 점검은 30분, 차체 도색은 한 시간 정도 걸리고요."
"그럼 차체를 하얀 색으로 칠하고, 오일을 갈아주세요. 제발 천천히요."
나는 서둘러 블루멘펠트 치과로 향했다. 뛰다 걷기를 반복하다가 주유소에서 준 쪽지가 생각나 걸음을 멈췄다. "정확하게 1시간 10분 뒤 차를 가지러 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차를 폐차장으로 보낼 겁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마라톤 선수가 못되기에 금방 숨이 턱에 차올랐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블루멘펠트 치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50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치료고 뭐고 얼른 돌아가야 했다. 주유소에 다시 돌아오자 그곳 직원들이 차를 폐차장으로 보내려고 막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이제는 한 가지 방법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걸 써먹기로 결심했다. 차를 블루멘펠트 치과 앞으로 몰고 가서는 가로등에 들이박아 버린 것이었다. '비숍의 굽은 지팡이 가로등'이었다. 속 시원하게 부서진 차량 보닛이 최소 두 시간은 주차를 허락해 줄 것 같았다. "진작 이렇게 주차할걸."
나는 웃으며 치과로 들어갔다. 블루멘펠트 박사가 치료를 막 끝냈을 때 밖에서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내 차 뒤에 다른 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 계단을 쿵쿵대고 올라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와선 소릴 질렀다.
"아니 여기 이렇게 오랫동안 차를 세우면 어떡합니까. 가로등이 당신 혼자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posted by 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