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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Oct 08. 2021

뉴올리언스, 20년 전 나를 만나다

뉴올리언스




뉴올리언스로 떠난 것은 재즈 때문이었다.  복무산되자 나는 심란해졌다. 뉴저지주 클로스터에서 이백 평이 넘는 관사에 살 때였다. 구들과 재회가 미뤄진 아이는 밤늦도록 피아노 쳤다. 나는 NBC TV의 심야프로를 무음으로  놓고, 피아노 소리가 그칠 때까지 빨래를 갰다. 투나잇쇼를 새로 맡은 지미 팰런이 저혼자 웃다가 연신 입을 벙긋벙긋댔다.  겨울이 있었다.


봄이 오고 아이가 먼저 서울로 났다. 나는 밤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붉은 천으로 된 건반 덮개를 만지다가 뉴올리언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의 손끝에서 나와 이층 계단으로 올라오던 '미스티'나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 듣고 싶어서였다. 다음 날, 출근하는 대로 프레지던트 데이를 끼워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러자 뉴올리언스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둘 더 보태졌다. 미시시피강을 따라 는다거나 또는 마크 트웨인의 흔적고 싶다는. 지만 때는 몰랐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목적지가 따로 있다'는 것을.



뉴올리언스는 Big Easy, Dixieland, NOLA, the Crescent City라는 별명을 가졌다. 나는 '굉장히 쉽다'라는 뜻의 '빅 이지'에  맘이 끌렸다.


세 시간 반을 날아 루이암스트롱 공항에 내렸다. 뉴올리언스는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죽기 전에 꼭 방문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 맨 위에 올려놓는 곳이다. 나는 렌터카를 몰고 폰차트레인호수를 돌아 시내로 들어갔다. 딥 사우스(Deep South)라 부르는 미국의 남부 도시. 원래는 장장 6천 킬로미터를 흘러온 미시시피강이 천천히 멕시코만과 합쳐지는 늪지대였다. 미시시피란 인디언 말로 '어머니의 강'란 뜻이다. 어머니란 단어가 큰 글씨로 다가왔다.


호텔 방에 캐리어를 던져 놓기 무섭게 프렌치 쿼터를 찾았다. '비유 카레'(Vieux Carré)라 부르는 네모난 프랑스 역사 지구, 그 한복판에 버번 스트리트가 있다. 끈적거리는 공기와 알싸한 케이준 푸드 냄새. 어디서 문을 열었다 닫는지 재즈 연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도시는 처음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잡혀 온 흑인들은 그들의 애수를 격렬하게 연주할 때 '재즈 잇 업'(Jazz it up) 이라고 외쳤다. 그렇게 '재즈'란 동사가 처음 쓰였다


프리저베이션 홀에 도착했다. 여긴 250년 된 창고를 개조해 매일 밤 재즈 공연을 여는 곳이다. 다 쓰러져 가는 어두침침한 건물은 화장실도 에어컨도 없었다. 낡은 의자는 나처럼 미리 예약한 외지인들로 먼저 채워졌다. 무대가 높지 않아 뒤에 앉으면 공연이 보이지도 않았다. 다음은 현장에서 줄을 서 표를 산 사람들이 들어와 사이사이 맨바닥에 앉았다. 그 사람들이 아니었면 "여기서 세계 최고의 재즈를 연주한다고?" 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마침내 늙은 흑인 뮤지션이 등장하고, 칠이 벗겨진 트롬본을 입에 물었다. 재즈 피아노가 인트로를 시작했다. "조지아- 조-지아~" 귀에 익은 벌스와 뒤이은 스캣. 나는 몽롱한 분위기에 오금을 부여잡고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에 빠져 들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다음 날이 밝았다. 호텔 식당은 폭스 TV의 마크 트웨인 다큐멘터리를 틀어놓았다. 올해가 사후 100주년이 된다고 했다. 뉴올리언스 하면 미시시피, 미시시피 하면 마크 트웨인이다. 그의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 샘이라 불리던 그는 11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에 취직했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짜리가 말이다. 뉴올리언스에서 목화와 사탕수수를 싣고 출항한 배 15일 동안 강을 거슬러 올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다. 그 배에 탄 것이다. 선원 중엔 물길을 찾는 수로 안내원이 있었다. 샘은 그의 조수로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정식 도선사(導船士)되었다.



미시시피강은 길이 6210㎞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미국 31개 주를 적시며 흐른다. 미국 땅의 30%에 해당하는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


물의 깊이를 잴 때 패덤(fathom)이란 단위를 썼다. 1패덤은 6피트 즉 1.8미터. 샘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수심 측정이었다. 뱃전에 늘어뜨린 로프의 매듭이 잠기는 정도를 보고 물의 깊이를 읽었다. 증기선이 맘 놓고 다닐만큼 수심이 깊어지면 샘은 "트웨인" 하고 소리쳤다. 트웨인은 'Two Fathom'을 줄여 한 번에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면 도선사는 "수심 2패덤 이상을 유지하라!"라고 외쳤다. 샘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이 말을 나중에 필명으로 다.


"크 트웨인!"(Mark Twain!)



이렇게 생긴 배를 패들 휠러(Paddlewheeler)라 부른다. '퀸 오브 미시시피'는 7일 동안 뉴올리언스, 멤피스, 내슈빌, 세인트루이스를 오르내리는 유람선이다.


오후엔 미시시피강으로 가보기로 했다. 시내 프렌치 쿼터에서 5분만 걸으면 강이다. 몇 번의 허리케인을 겪은 이곳 사람들은 무너진 강둑을 다시 쌓고, 그 위로 문워크(Moon Walk)라는 이름의 산책로를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 유람선 선착장까지 걸을 참이었다. 그렇게 강변을 걷다가 운명의 그를 만났다. 강둑 풀밭에 앉은 중년의 남자. 그를 본 순간 외모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을까. 기억의 시계를 되돌렸다. 지난 세월과 인연이 천천히 되감겼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딱 멈췄다. 퍼즐이 맞춰진 듯 그림이 선명해졌다. 나는 소스라쳤다.


누가 여행을 자기 자신 만나는 일이라 했던가. 늙은 개를 끌어안은 사내는 20년 전 미시시피강으로 떠났던 나 자신이었다. 경기가 시들해져 유람선을 내린 '과거의 나'는 온갖 몸 품을 팔며 버티다 길바닥에 나앉은 게 분명했다.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개가 먼저 나를 반겼다. 집에서 키우던 골든레트리버였다. 그동안 겪은 일로 사내는 초췌했지만, 과거의 내가 숲으로 난 인적이 드문 길을 택했더라면, 지금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 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신문의 공고대로 뽑혀 서울을 떠났다면 말이다.



딕시랜드의 Dixie는 10을 뜻한다. 뉴올리언스 은행이 10달러 지폐를 발행하면서 뒷면에 불어로 Dix라고 썼다. 그때부터 이 지폐가 통용되는 지역을 딕시랜드라 불렀다


아아 그랬다면 저기 뉴올리언스 로컬 맥주, 아비타(Abita)를 마시다 말고 비스듬히 강둑에 누운 홈리스 맨이 바로 나인 것이다. 무슨 영화를 보는 듯했다. 그는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눈치 빠른 늙은 개 타임 와프(time warp)를 건너온 나와 홈리스 맨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되찾는다'라는 뜻의 레트리버(retriever)답게 옛 기억을 재빨리 회수한 모양이었다. 나는 산책로 난간에 기대어 서서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와 나의 발밑으로 도저 강물이 느릿느릿 흘렀다. 물살은 까마득한 20년 저편의 기억을 끌고 와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1980~90년대에 <해외개발공사>라는 국영 기업이 있었다. 공사가 하는 일은 사람을 구해 달라는 외국 기업의 요청을 받고, 조건에 맞는 이들을 뽑아 해외로 보내는 것이었다. 파독 광부나 간호사 또는 중동으로  건설 인부들이 그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였다. 나는 집을 나와 마포구 용강동 직원 합숙소로 주민등록을 옮겼다. 거긴 대구상고나 광주상고 같은 지방 고등학교를 나온 젊은 직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나이는 내가 많고, 직장 경력은 그들이 앞서 우리끼리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월급을 모아 어느 정도 뭉칫돈을 마련하면 미국이나 일본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아버지와는 왕래가 끊겼고, 형 동생과는 형편이 나아지면 연락하자고 뿔뿔이 흩어진 터였다. 모든 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미시시피강은 우리 인생과 같다. 누가 옳다고 할 수 없는 인생의 긴 이야기가 미시시피강을 따라 흐른다. 그들도 언젠가는 종착역인 바다에 닿아 인생이란 여행을 마무리한다.


장례를 치른 지 100일이 안 돼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혼기를 놓친 젊은 계모는 아버지보다 나와의 나이 차가 더 적었다. 그녀는 오동나무로 만든 나즈막한 2단 서랍장을 유일하게 혼수랍시고 들고 왔다. 그러자 형은 군의관 말년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며 의무대 휴일 당직을 자청했다. 동생은 서둘러 입대해 버렸다.


어머니의 온기 남아있는 집에서 아버지와 계모와의 동거를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도 싫고 계모도 불편한 나는 2층 구석방에서 숨만 쉬며 버텼다. 마당이 좁다고 뛰어다니던 레트리버도 꼬리를 감췄다. 밤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나 안방에 놓인 낯선 오동나무 서랍장을 들어내자며 나를 불렀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말리지도 못하고, 거들지도 못한 채 아침을 맞곤 했다. 해일같은 슬픔이 밀려온 어느 새벽, 나는 물 먹은 솜이불처럼 기진한 몸을 끌고 집을 나왔다. 내가 갑자기 사라진 걸 아버지가 알기는 했을까.


어렵사리 용강동 합숙소에 자리를 만들었다. 명절 연휴에도 혼자 숙소에 남았다. 다행히 구내식당이 문을 닫지 않았다. 그때 식구 옆에 뒹구는 조선일보에서 해외개발공사의 인력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검정뿔테안경처럼 굵직한 테두리선으로 둘러쳐진 《미시시피강 유람선 승무원 구함》이라는 5단 반짜리 광고였다. '주급 보장' '숙식 제공'이란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더구나 '영어 회화 가능자 우대' 라니. 미 8군 회계감사로 군복무를 마친 나는 영어로 혼잣말을 궁시렁대던 때였다.



뒤로 보이는 스팀보트 나체스(Natchez)는 저녁 7시에 선상에서 저녁을 먹고 재즈를 감상하는 디너 재즈 크루즈(Dinner Jazz Cruise)를 운영한다. 1인당 79달러


나는 신문 광고를 찢어 지갑 속에 넣었다. 출근하던 날, 종로구 연건동 공사 건물로 찾아가 반명함판 사진 두 장을 붙여 원서를 제출다. 며칠 후 서류 심사에 합격하자 덜컥 겁이 났다. 이곳에서의 삶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나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자신이 없었다. 그날 밤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등짝을 두들겨 맞는 꿈을 꾸었다. 현실을 피해 또 도망치는 것밖에 더 되냐는 호된 꾸지람과 함께. 온갖 고민을 하던 중에 면접마저 붙고 말았다.


결국 나는 떠나지 못했다. 모험이었다면 나는 으스대며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그러나 도피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가방을 꾸릴 수 없었다. 아쉬움이 들 때마다, 집에선 내몰렸지만 서울에서마저 쫓겨나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용강동 합숙소에서 100미터쯤 걸어 한 동짜리 '강변 대호아파트' 옆 토끼 굴을 지나면 한강에 닿았다. 거긴 마포대교 건너 여의도 마천루가 비웃듯이 나를 건너다 보며 서쪽 햇빛에 번들거리는 곳이었다.


강가에 서면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그새 강이 되었다. 언제나 마르지 않는 깊은 강. 아무리 가물어도 자식 먹일 물 마련하고, 어떤 물난리가 나도 자식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았던. 여름 내내 퇴근하는대로 저녁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누구에게랄 것 없이 변명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날마다 물수제비를 뜨며 상념의 구두점을 찍었다. 하지만 몰랐다. 그때 나의 또 다른 자아는 편도 비행기 표를 사 들고, 저 혼자 미시시피강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삶은 소 잔등처럼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한때 나는 버리고 훌쩍 떠나는 삶을 동경했다. 지금은 아니다. 이젠 버티는 삶을 더 존경한다. 지구인에겐 지구력이 필요하니까.


20년의 시간을 돌아 '나'와 '나였을 그'가 다시 만났다. 그것도 어머니의 강, 미시시피에서. 강둑에 비스듬히 드러눕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가 나를 부른 건지, 내가 그를 찾아온 건진 몰랐다. 아무려면 어떨까. 나는 그가 반가우면서도 애틋했다. 인생에서 가장 추운 몇 년을 용강동 합숙소에서 보내고, 나는 회사 프로그램에 지원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의 20년은 어땠을까. 나처럼 곡절했을까. 인기척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20년 전 나의 또 다른 현재랍니다."

(You are my other present self 20 years ago.)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놓은 콜라 컵을 손으로 가리켰다. 동전 몇 개와 구겨진 지폐가 고개를 디밀었다. 그 옆엔 종이 박스를 뜯어 만든 두툼한 사각형 골판지손 글씨로 무언가를 써놓았다.

 

"Hindsight is always 20/20."



어떤 세월도 그냥 흐르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그만한 값어치를 치르게 하고 간다.


나는 그 무슨 뜻인 줄 몰랐다. 뉴올리언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 말의 출처를 알았다. 그것은 당시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내건 캠페인 구호였다. 직역하면 '지나간 것을 보면 완벽한 시력으로 보인다'라는. 버니 샌더스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지난 정권 사람들이 저지른 잘잘못을 명백하게 볼 수 있으므로 허투루 보낸 세월의 교훈을 깨닫고 앞날을 올바르게 준비하자'라고 호소했다.


문장과 관련된 저간의 사정을 알았다고 해서 그 말이 내 머릿 속을 떠나진 않았다. 외려 궁금증만 더했다. 이름도 모르고 헤어진 강가의 사내는 그저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늙은 레트리버는 정말이지 나를 알아까. 그가 보여 준 문장에서 내 지나간 삶의 무언가가 명백해졌단 말일까. 아니면 그가 내게 하려던 말이 따로 있던 것이었을까. 마치 나는 20년 전 마포대교 아래에서 띄운 유리병을 미시시피강에서 건졌는데, 병 속 종이에 쓴 글자가 세월에 희미해져 읽어내지 못한 기분이 되었다.


얼마 후 버니 샌더스가 대선 후보직을 힐러리에게 양보했다. 나는 뉴욕의 거리 전광판에서 그의 사퇴 뉴스를 마주치면 뉴올리언스를 소환했다. 새벽마다 불 꺼진 새시 창으로 범람하던 미시시피. 퇴근 길, 조지워싱턴브리지에 올라서면 뉴올리언즈 호텔 폭스 TV에서 마크 트웨인이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 일로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접은 돛을 펴고 무역풍을 담아 안전한 항구를 떠나라'라는. 


나는 혼란스러웠다. 20년 만에 만난 뉴올리언스의 그가 혹시 내게 하려던 말이 이런 것이었을까. 어머니의 부재로 생긴 충격과 혼란으로 과거의 나는 현실에 주저앉았지만, 저문 강에 돌팔매질하듯 불확실한 미래로 스스로를 던져넣었어야 하는 것이 가장 나답다고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때 어디선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천상 "얘야, 넌 나중에 뭐가 될 건데?" 하고 나를 깨우던 어머니의 질문과 하등 다름없었다.


"Where else do you see yourself again next time?"

(당신은  어디당신 자신을 만날 ?)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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