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책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어쩌다 보니 쉼 없이 재독(再讀)을 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방대한 사상을 한 권의 책에 담다니. 게다가 그의 사상에는 '나는 반대올시다'라고 외치고 싶은 구석이 의외로 많았다. 감상문을 쓰는 것도 쉬운 작업은 아닐 것 같았다. 대체 왜 니체는 그를 보고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라고 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그의 일생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찾아봤다. 그러던 중 한 문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여자는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되었다.
-쇼펜하우어-
그렇다. 비록 이 책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여성혐오자였다. 얼씨구. 검색해 보니 아예 대놓고 <쇼펜하우어가 여자를 혐오하는 철학적 이유>라는 책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절판되었다. 게다가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물론 부자가 죄는 아니지만 책 곳곳에서 그의 부르주아적 철학 관념이 엿보인 탓에 나는 정작 집중해야 할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그렇게 1독 후 뭔가 개운하지 않은 기분에 재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두 번 읽으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개인사가 궁금해졌고 그의 일생에 관한 글을 따로 챙겨 읽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간과했을 그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뒷모습은 지나치게 쓸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중 여전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다만 그의 염세주의 철학이 있었기에 니체를 비롯해 헤르만 헤세, 융, 아인슈타인 등 후세의 빛나는 업적도 있었으리라. 덕분에 나 역시 학창 시절 놓친 철학을 이제야 들여다본다. 어쩌면 철학은 철이 들라고 하는 공부가 아니고 철이 들 즈음 하는 공부일지도 모르겠다. 위로 늙고 쇠약해진 부모님과 아래로 사춘기 자녀를 둔 마흔에 더없이 어울리는 공부다.
고통과 무료함은
어느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
-쇼펜하우어-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왜 갑자기 다시 유행하는 것일까? 얼마 전 MZ세대가 염세주의에 물들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MZ세대는 '노력이 잘 먹히지 않고' 실패가 잦아서 한계와 좌절을 겪고 불안과 무기력을 안고 사는 세대라고 한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궁핍과 결핍은 고통을 낳고 안전과 과잉은 무기력을 가져온다.'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양극화에 한계를 느낀 청년들은 '오직 현재를 즐기는 욜로족'과 '아이를 갖지 않는 딩크족' 문화를 창조해 내며 쇼펜하우어의 쓸쓸한 철학에 공감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진정한 주체로써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보다 25년 늦게 태어나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덴마크 사상가 키르케고르는 어땠을까?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처럼 헤겔의 사상에 반대하며 '불안' 등의 개념을 키워드로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다만 무신론자였던 쇼펜하우어와 비교했을 때 절망에 이르는 병을 '믿음'으로 풀어낸 점이 달랐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앙은 이성이 떠난 자리에서 시작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점이 내가 성경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여전히 이성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니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어받은 니체 역시 삶의 근원을 '의지'에서 찾기는 마찬가지였다. 니체가 말한 '의지'란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와 왕왕 비교 논의되어 왔는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욕망을 전제로 한 맹목적인 의지이고 니체의 '의지'란 '힘에의 의지'로 '더 높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이를 '권력에의 의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한 권력은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아닌 것으로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니체를 있게 한 쇼펜하우어에게 감사하지만 니체의 사상에 더 많이 공감하는 편이다. 물론 딱 알고 있는 만큼만.
다시 책 속으로 돌아와, 쇼펜하우어는 행복과 불행이 타고난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염세주의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그가 평생 자신의 성향에 환멸을 느끼고 바꾸려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그가 교육으로 제2의 성격을 만들 수 있다고 한 주장과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한 그의 삶의 흔적을 통해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타고난 기질 외에도, 쇼펜하우어는 어릴 적 양육 환경으로 인해 편집과 결벽증에 의한 불안형 애착 성향을 보였다고 하니 누구를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단 한 명'의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국가도 없었다는 쇼펜하우어에게 아트만(반려견)이 함께였던 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담인데 아트만의 초기 이름은 헤겔이었다는 걸 보니 쇼펜하우어도 처음부터 동물을 사랑한 건 아니었을 지도?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쇼펜하우어-
나 역시 한 때 '고통을 줄이는 것만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가난의 결핍, 부의 과잉에서 오는 무료함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형태로 삶을 파고든다. 누군가의 괴롭힘과 질투를 피하고, 세상에 희망을 갖지 않는 등 완벽한 타인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아무리 지독해도 혼자가 되는 '고독'이라는 묘책을 쓸 수 있다. 물론 이마저도 가난한 철학자라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런데 가족(사랑)이라는 불완전한 타인으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은 때때로 줄일 수조차 없고 그저 오로지 감내해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를 증오한 쇼펜하우어가 스스로 가족을 만들지 않고 사람과 사랑을 멀리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혹, 그에게 충족되지 않았던 욕망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문득 나는 부유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과연 행복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의 말대로라면 행복과 사랑은 어차피 환상인 것을, 손에 잡히지 않으니 잡으려 하지 않았을 텐데. 천재에 가까웠던 그는 '많은 지식이 인간을 쓸모없고 둔하데 만든다'라고 주장했음에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부단히 내면을 채워 지혜롭고자 했다. 현재를 즐기라고 했지만 그 역시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불안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이 아닐까? 결국 쇼펜하우어도 수많은 현자들처럼 우리에게 '철학적 역설'이라는 퍼즐 숙제를 내 준 셈이다. 앞도 맞고 뒤도 맞아서 뭐가 앞이고 뭐가 뒤인지 모를, 이러니까 늘 퍼즐을 제멋대로 껴맞추는 경우의 수가 생기는 것이겠다.
이번에는 감상문을 짧게 작성하리라 줄이고 줄였는데 역시 만족할만한 길이는 아니다. 다 넣을 수 없지만 꼭 넣고 싶은 내용이 워낙 많았다. 고작 한 권의 책으로 나는 얼마나 쇼펜하우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일 것이다. 앞서 저자는 독자에게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의 위로보다는 조언을 얻어가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서 조언과 연민 그리고 넉넉한 위로까지 얻어간다. 심리학을 쫓아가니 철학에 닿았다. 어릴 때 너무 놀았나 보다. 창밖으로 쏜살같이 세월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