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를 읽고
하지만 나는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멋진 신세계> 야만인 존-
지난 새벽 시아버지가 숨을 거두셨다. 한 달 전만 해도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던 90세 노인이었는데 말이다. 태양은 여느 때처럼 떠올랐고 '한숨' 모자란 오늘 새벽 공기는 태연하기만 했다. 다행히 지난밤 통증에 차라리 죽고 싶다던 시아버지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며느리가 무슨 눈물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졌고. 가슴이 텅 비어버렸다는 시어머님 말씀에 참을 수 없이 마음이 저려왔다. 이 정도면 호상(好喪)이라는데 죽음에 무슨 좋은 죽음이 있을까. 자고 일어나면 그저 꿈일 것만 같다.
나는 어째서 지금 <멋진 신세계>를 읽게 되었을까?
책 <멋진 신세계>를 읽는 동안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이 흩어졌다 모이는 것을 경험했다. 마치 지난 몇 년 끙끙대며 홀로 풀고자 했던 삶의 과제들이 한순간 답을 찾은 것처럼 느껴졌다. 거창한 설명이 무색하게도 답은, 답이 없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롤러코스트같이 몰아치는 <멋진 신세계>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양극의 세계를 깊이 고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진리는 결국 닿는 것이 아닌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멋진 신세계 17장 네 사람의 대화를 보며 퍼즐은 서서히 맞춰졌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던 니체(1900년 사망)의 말이 저절로 떠오른 걸 보면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헉슬리도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인류는 유사 이래 한 번도 '허무주의'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은 결국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매우 산발적 이게도 가파른 언덕 위로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했던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도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굴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이다.
과거 호텔에서 일할 때 멋진 영국 신사와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난다. 호텔 안에 모든 시설이 갖추어있어 편리하다 말하니 "조금 불편한 게 더 좋다"며 위트 있게 대답했던 그는 입주 후 쭉 자전거로 출퇴근하더라. 중국 정치를 공부하며 중국인 친구와 '알 권리'와 '불행할 권리'에 대해 토론하던 유학시절도 떠올랐다. 열정만 가득했던 그 당시 나는 무력감을 느꼈고 내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행과 비극은 내 것이 아닐 때는 차마 입에 올리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삶은 참으로 역설절이다. 과학 문명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미래는 마치 인간의 뜻대로 흘러갈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위로 달린다고 했던가. 인류의 반복된 어리석음이 흑역사를 만든 것처럼 신념을 지켜냈던 소수의 위인들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 것이 사실이 아니던가. 유토피아가 없듯 디스토피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강력한 채찍과 무기 또는 자극과 쾌락 양극의 세계가 공존하지만 인간의 선한 의지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상태,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비로소 삶의 역설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아닐까? 인생의 모든 굴곡이 행불행의 연결이라면 그 안을 채우는 것은 결국 모호함의 여백이다. 우리가 견뎌야 하는 것은 명쾌함이 아닌 모호함인 것이다.
정말 '멋진' 책을 한 권 읽었다. 영화라면 섬으로 유배되는 버나드와 헬름홀츠를 중심으로 멋진 신세계 시즌2가 만들어지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또한 꾸준히 책 속에 등장하여 '소마'로 불리던 '마'법의 '약'물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음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냄새 풍금과 촉감 영화가 궁금해지는 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결국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을 채울 문명의 발달은 피할 수 없다. 다만 고민하고 해답을 찾는 탄력적인 노력과 의지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야만인 존을 통해 인용된 셰익스피어 문장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셰익스피어 전집을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한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그저 로맨스로만 기억될 만큼 가벼웠다. 한편 SF 장르를 유독 거부하던 나에게 작년부터 딸아이가 추천하던 책 <1984>도 서둘러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SF가 생각만큼 차가운 장르는 아니었다는 사실. 세상엔 '무지한 사람'과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던데. 나이가 들수록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없는 이유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나는 당분간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오늘은 하루가 참으로 길다.
책 <멋진 신세계>에 대해서
소설 <멋진 신세계>는 영국의 조지 오웰 <1984>, 러시아의 예브게니 자먀틴 <우리들>과 함께 대표적인 고전 디스토피아(Dystopia) 소설이다. 여기서 디스토피아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면에서 유토피아(Utopia)와 같지만, 유토피아는 이상향의 세계인 반면 디스토피아는 부정적인 모습의 가공 세계를 의미하며 소설은 이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디스토피아와 같은 뜻으로 역(逆) 유토피아, 카코토피아(Kakotopia), 안티유토피아(Antiutopia)가 있다.
<멋진 신세계>는 총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문 제목은 Brave New World로, 존이 야만인 거주 구역에서 나와 문명 세계를 처음으로 봤을 때 읊는 구절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Brave라는 단어는 중세 영어로 '용감한'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즉, '멋진' 혹은 '아름다운', '훌륭한' 등의 뜻이 맞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A.F.(After Ford) 632년, 서기 2540년 26세기로 추정하며 헉슬리는 약 600년 후 미래를 예언하며 이 작품을 썼으니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작중 '헨리 포드'라는 인물이 매우 흥미로운데 그는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최초의 대량생산 방식을 고안한 사람'으로 '포디즘'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거의 신격화된 인물로 묘사된다.
멋진 신세계 VS 1984
디스토피아 3대 대표 소설로 1921년 러시아 예브게니 자먀틴 <우리들>, 1932년 영국의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49년 조지 오웰의 <1984>이 있다. 이 중 1921년 소설 <우리들>은 두 작품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조지 오웰과 헉슬리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단, 헉슬리는 부정, 헉슬리는 독자적으로 당대 유토피아를 비틀었다고 평가됨) 결국, 이 세 소설 모두 미래의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장르계의 효시로 평가되며 이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래는 그 차이가 극명한 헉슬리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를 비교해 보았다.
멋진 신세계 등장인물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