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다음 달 일정과 생일을 챙긴다고 달력을 펼쳤다. 시월 한 장을 넘기지 못하는, 나는 이번 달이 평범하지 않음을 느낀다. 시간이 멈춘 것도 아닌 것이 느려도 보통 느린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부상을 겪은 한 달 동안 이상한 경험을 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마치 반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즐거운 경험을 할 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고통을 겪을 때 시간은 야속하게도 천천히 갔다. 그렇다면 시부상을 지낸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버지의 얼굴이 여전히 생생하다. 마지막 가실 때는 차마 입을 닫지 못하셨는데. 미처 하지 못 한 말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다. 있으셨겠지. 90 인생을 사셨는데 어찌 할 말이 없으실까. 계시는 내내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던 아버지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와이프에 일하는 아주머니까지 아버지의 말이라면 뭐든 옳다는 삶을 사셨는데. 그만하면 행복한 시간을 사신 것이 아닐까. 젊은 시절 몸이 약해 폐렴으로 죽을 뻔한 적도 있으시다는데. 무섭기로 소문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지만 손바느질에 가구 손보는 일도 척척 해내시던 가장이셨는데. 아버지는 마침내 당신의 삶에 만족하셨을까.
아버지는 모두에게 근엄하고 엄격한 분이셨다. 소싯적엔 재주도 많으셨다는데. 아버님 집 거실과 안방에 놓여있는 액자를 보니 그분의 어린아이 같은 품성도 엿보인다. 액자 속 홀로 걷고 있는 여인이 쓸쓸하지 않도록 20세기 잡지에서 남자 모델을 오려 감쪽같이 콜라보 작품을 만들어놓으신 아버지. 나는 왠지 웃음이 난다. 그런 반짝임과 인간적인 따뜻함을 아버지는 왜 그리 꽁꽁 싸매고 사셨던 걸까. 어쩌면 나도 아버지와 더없이 평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늘 스스로 위대함을 자처하며 타인을 멀리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우셨을까.
시아버지가 응급실에 계실 때 잠시 정신을 놓으신 적이 있다. 급성심근경색에 의한 일시적인 섬망이라고 하는데 아주 딴 사람이 된 것이다. 미처 갈아입지 못한 바지는 노릿하게 젖어들고 아버지는 뜬금없이 수십 년 전 헤어진 여동생을 찾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아버지답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된 아들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저리 나약한 인간인 것을 왜 그리 몸에 힘을 주고 사신 걸까. 주머니를 더듬으며 손수건을 찾던 나는 온몸이 아파왔다.
아버지를 두고 오는 길에 창밖은 온통 가을로 진통하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고 침묵 속에서 종종 자동차 깜박이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이 이렇게 잔혹한 계절이었던가. 타이어에 밟히고 날리어 신음하던 낙엽들이 과거 저 편으로 사라지는 데까지 걸린 한 달은 참으로 길고 지난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