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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May 03. 2024

여자가 머리를 한다


1994년 여름 내 인생 처음으로 숏커트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까마득히 먼 이야기지만 싹둑싹둑 잘리어 현란하게 흩어졌던 머리카락처럼 나는 그즈음 사춘기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기억의 형태는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데로 변형되기도 한다. 분명 그때가 처음은 아닐 테지만 내가 기억하는 미용실은 그날이 처음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좋은 냄새가 났다. 예쁜 언니들에게서 나는 상큼한 냄새다. 나와 내 친구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거기 앉아’라는 목소리에 이끌려 우리는 각각 서로가 엿보이는 대형 거울 앞에 앉았고 애써 어색함을 누르며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거울 속의 나를 그렇게 긴 시간 응시해 보긴 처음이었다.


우리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유는 몇 가지 즈음될까. 머리카락이 길어서? 학교에서 또는 부모님이 자르라고 해서? 그것도 아니면 스타일을 바꾸고 싶어서일까? 여성이 미용실을 찾는 각별한 이유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심중의 변화가 생길 때이다. 연인을 비롯해 누군가와 이별을 할 때 우리는 머리카락을 잘라냄과 동시에 ‘과거의 그 어떤 사실’과도 작별인사를 나눈다. 일종의 애도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미용실은 꽤 신성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한참 동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홍조를 띠고 있었고. 예쁜 언니의 농담 한마디에도 사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했지만. 사실 그날 내가 미용실을 찾은 진짜 이유는 마음속의 한 친구를 떠나보내기 위함이었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두 눈을 보니 나는 다시 눈물이 났다. 눈에 뭐가 들어갔냐며 화들짝 놀라 묻는 예쁜 언니의 물음에 그저 하품이 났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쓱싹쓱싹 가위질 소리에 정적을 깨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에는 짧은 커트 머리의 낯선 여자아이 하나가 앉아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다니며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나 역시 첫사랑과 짝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쌓았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머리카락도 자랐고 사랑이 끝나면 나는 기르던 머리카락을 잘라내곤 했다. 미용실은 언제나 향긋한 냄새가 났고 여전히 예쁜 언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해 지나 내가 결혼하던 날, 신부화장을 위해 엄마와 나란히 거울 앞에 앉았다. 메이크업을 받으며 엄마와 나는 거울 넘어 서로를 조심스레 훔쳐봤다. 혹시 눈이 마주치면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그렇게 과거의 나를 떠나보냈다.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직장에 다니는 10여 년 동안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간간이 미용실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울 속 자신감 넘치는 커리어우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후 아이를 갖고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는 나에게 더 이상 애도할 대상은 없을 줄 알았다.


불행은 행복이 방심하는 틈에 찾아왔다. 그 후 나는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 불행하게도 두 아이 모두 심장소리와 태동을 느낀 후 진통으로 보낸 아이들이다. 중기유산도 출산과 비슷한 과정을 겪기에 산후조리가 필요했던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미용실을 찾을 수 있었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잘랐고 회사도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두고 또다시 몇 해가 흘렀다. 마흔을 넘기고. 나의 머리에도 한 두 가닥 세월의 흔적이 보이더니. 이젠 찾지 않아도 제법 눈에 띄는 하얀 머리카락들. 순응하는 마음으로 뽑지 않고 그들에게도 자리를 내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미용실을 찾았다. 마주 앉은 내 모습이 낯설다. 이제 곧 쉰이라는데 거울 속에는 숏커트 여자아이와 첫사랑을 보내던 여대생, 신부화장을 하며 눈물을 삼키던 청년 여성도 그대로 머물러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애도했던가?


시원하게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거울 속 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찬찬히 내 모습을 살펴보니 이제 제법 나이 든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총기를 머금던 눈동자는 어느덧 흐릿해지고 지구의 중력을 증명하듯 쳐진 입꼬리와 패인 팔자주름이 얼굴 중앙에서 시위를 한다. 심지어 쌍꺼풀이 어쩌면 주름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 많던 머리숱은 한 줌에도 가볍게 쥐어졌고 말하다가 웃기라도 할 때면 쏟아지는 잔주름이 한 바가지다. 샴푸 후 착 달라붙어 초라한 머리를 보니 세상에 중년이 틀림없구나.


드디어 드라이가 끝나고 제법 정돈된 머리를 들여다보니 이제 좀 봐줄만 하다. 헤어숍은 언제 들러도 향기롭다. 이제는 예쁜 언니들보다 오빠들이 많고 그마저도 아들뻘이다. 대형 거울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덕분에 나는 꽤 긴 시간 나와 독대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머리 하는 시간이 참 좋다. 나에게 머리를 한다는 건 거창하지 않지만 낡은 나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3개월이 지나면 또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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