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목포의 눈물>
아침 일찍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가 아빠 생신이었고 내가 생일 선물로 아빠의 애창곡 <목포의 눈물>을 불려드렸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은 무려 1935년 발표된 곡으로 민요풍의 가락과 구슬픈 곡조가 잘 살아있는 노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아버지 고향은 전라도다. 노래 가사 중 '삼백 년 원한 품은'은 과거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삼백력 원안풍은'으로 바꿔 부른 일화도 있다고 한다. 불러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노래가 얼마나 깊은 설움을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려야 불러지는 지를.
나는 아빠를 평소 아버지라고 부른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빠 이야기를 할 때는 더더욱 '아버지'라는 단어를 선택하곤 한다. 그런데 엄마는 어머니로 불린 적이 없다. 어머니는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는 내가 아버지를 실제로 엄마만큼 친근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와 아빠는 어느 쪽이 더 좋으실까? 나는 내 맘대로 아빠도 '아빠'로 불려지길 원할 것이라고 가늠해 본다.
아빠의 인생은 어땠을까? 지극히 가부장적인 아빠는 그 무거운 책임감에 비해 녹록지 못 한 교육 및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아래로 줄줄이 동생이 넷이었던 아빠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빠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술만 드시면 '못 배운 것이 한'이라며 한없이 무너지곤 했다. 거대한 아빠가 쓰러지는 장면은 아이들에게 꽤 공포스러운 기억이기도 하다. 아빠는 한글도 영어도 독학으로 깨쳤다. 아빠가 꾹꾹 눌러쓴 글씨는 그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담겨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동안 아빠는 이미 한없이 왜소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나중에 아빠가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으셨을 땐 마치 그조차 담지 못해서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외에 사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나는 매일 친정집에 전화를 건다. 최근 몇 년 과거 배운 심리학 을 끄집어내어 나의 일상과 접목하고 내 고통을 치유하는데 쓰면서 나는 무던히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곤 했다. 비록 전화로였지만 과거 속으로 돌아가 가족들과의 관계를 더듬고 서운하고 힘들었던 그리고 죄송했던 일들을 담담하게 나누었다. 담담하다는 표현보다는 역동적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겠다. 실제로 종종 나는 아빠에게 사과했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평소 과묵하신 편이지만 아빠 역시 언제나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아주 가끔은 진즉부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지만 지금이 늦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와 화해하지 않거나 덮고 외면하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고통의 무게와는 관계없이 서로를 수용하고 용서함으로써 각자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사실 부모님께 서운했던 점은 나와 내 아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내가 부모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자세와 태도를 이야기할 때 엄마의 마음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방목보다는 방치에 가까웠다며 엄마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면서도 나에게 자유를 주어서 감사했고 어떤 체벌도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 시절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더 나아가 나는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했는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감사했던 건 고단한 삶이었음에도 우리 삼 남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건강하게 키워주신 부모님이었다. 나도 이제는 안다. 엄마에게도 죽고 싶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몇 해 전 아빠는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진행을 늦추는 약을 복용하고 계신다. 종종 감정조절에 실패하고 가까운 기억들을 지우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인지기능에 큰 문제가 없고 사람도 알아보신다. 그런 아빠는 매년 내가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어지간히 애를 쓰신다. 그래서일까? 아빠를 생각하면 나는 웹상에서도 아빠의 실수를 쓰고 싶지가 않다. 중요한 건 아빠와 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사이가 좋다는 점이다.
어제는 낮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아빠에게 선물할 노래를 연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막상 불러보니 트로트라는 장르가 너무나 생소하고 창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늘하늘한 목소리는 빵빵하게 힘을 채워야 했고 밋밋한 음성은 설움 가득 담아 구성지게 불러야 했다. 머리가 찡할 정도로 그야말로 온몸을 쥐어짜 내 바닥부터 소리를 비워내는 창법이었다. 나는 문득 아빠가 왜 이 노래를 좋아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목포의 눈물은 아빠의 설움을 닮아있었다.
아침 일찍 통화에서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찬 목소리로 딸, 사랑해!라고 말해줬다. 나 역시 망설임 없이 아빠 나도 사랑해요!라고 외쳤고 목구멍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목포의 눈물, 아빠에게 노래불러드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비누꽃바구니 선물 때처럼 여기저기 배포하지만 말아주시기를. 이참에 트로트 밴드로 전향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