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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mono Dec 27. 2019

낮과 밤 그 사이 어느 즈음에

전도연 공유 주연 <남과 여>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시간 개념이 없어지는 곳, 핀란드에서 남과 여는 만났다.

남과 여는 각각 우울증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를 키우고 있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내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가진 남편이 있다.


남과 여는 눈으로 뒤덮인 핀란드의 어느 숲 속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우나에서 사랑을 나눈다. 눈밭을 걸어오는 동안 차갑게 얼었던 몸을 녹일 수 있는 숲 속 사우나. 오로지 몸을 녹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 그곳에서 남과 여는 각자에게 주어진 혹독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 후 남과 여는 조용하고 깨끗하고 눈도 많이 와서 좋다는 핀란드를 떠났고 몇 개월 후 서울에서 재회한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맞춰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남과 여는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관계를 지속한다.

Photo by Fineas Anton on Unsplash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 밤에서 아침으로,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을 'blue hour'라고 부른다.

낮과 밤의 푸른 빛, 그리고 해의 붉은 빛이 담겨 있는 하늘을 찍을 수 있어 좋아한다고 한다.

남과 여의 마음은 'blue hour'처럼

낮인지 밤인지 아침인지 경계가 애매모호한

밤하늘의 푸르스름한 빛으로 표현된다.

Photo by Mitul Grover on Unsplash

 핀란드에 이어 서울에서도 계속되는 그들만의 테마인

 blue hour의 푸른빛이 영화 전반에 이어진다.

그러나 blue hour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만큼

영원하지 않다.

잠시라도 방심하는 사이

하늘은 어느새 깜깜한 밤으로 변해 있다.


남과 여는 잠깐이나마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둘 만의 시간을 갈망하지만

언제나 그 시간은 'blue hour'처럼

아름답지만 애매하고 짧았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어느새 찾아온다.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매한 만남을 이어가다

결국 남과 여는 각자 결정을 내린다.


여는 이혼을 한다. 그리고 다시 핀란드로 향한다.

남자의 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

여는 택시 기사에게 몇 시인지 묻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모르는 게 낫다고 말한다.

 여는 택시를 세워 놓고 푸른빛으로 변하는 중인

 먼 하늘을 바라보며 'blue hour' 같았던

남과 여의 만남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저녁은 오고,

새벽은 또 시작될 것이다.

Photo by Holly Mandarich on Unsplash

"우린 만날 때마다 어디 여행하는 것 같아요"

"정말 그러네"

"돌아가지 말까요?"

"그래요"

"농담 아닌데"

"우리 정말 큰일이다"


핀란드의 겨울, 눈으로 뒤덮인 숲 속 아무도 없는 뜨거운 사우나에서 시작된 '남과 여'는

 이제 여행에서 돌아와

현실을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여행을 가서는 돌아가지 말자고 쉽게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

여행이다.

남과 여는 이제 ‘blue hour’처럼

 ‘아름답지만 짧은 사랑’이라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가 되었다.


내년 겨울에는 시계와 스마트폰, 노트북은 서울에 두고, 읽고 싶은 책과 새 노트만 가득 채운 배낭 하나 메고

시간 개념이 없다는 핀란드로 떠나고 싶다.


시간에 맞춰 해야 할 일정도,

확인해야 하는 메일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카톡 소리도

 없다.


뜨겁게 달구어진 돌에 물을 끼얹으면

'치이이익'

 소리만 가득한 숲 속 사우나에 앉아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바깥 풍경을 보며

몇 시쯤 됐을까......

혼잣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Photo by Isaac Viglion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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