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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Jan 30. 2018

[영화] 코코

산 자가 잘 죽는 법. 망자가 영원히 사는 법.

영화 <코코>는 제목에서부터 영리한 기색이 폴폴 풍겨 나온다.


가장 기본적인 모음으로 구성된 두 음절 단어. 귀엽고 사랑스러움이 한껏 연상되는 이름. 아마도 여자아이의 이름. 코코 샤넬도 떠오르고. 혹시 동물의 이름? 도대체 누구의 이름일까 궁금했다.


영화 초반부에 알게 되는데, 아무런 대사가 할당되지 않은,
무기력하게 의자에 앉아있을 뿐인 주인공 소년의 증조할머니의 이름이었다.


2012년 코미콘(COMICON)에서 이 영화에 대한 구상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가제가 "망자의 날(Dia de Muertos)"이었다고 한다. '망자의 날'은 10월 31일에서 11월 2일까지 이어지는 멕시코의 축제 중 하나인데 11 월 2일은 공휴일로 정하고 죽은 자들을 기리는 풍습이 이어진다. 돌아가신 이들의 사진과 함께 설탕이나 초콜릿 등으로 해골 모형을 만들어 제단에 올려놓고 죽은 이의 생과 기억을 기념한다. 죽은 자의 영을 초대하는 길은 멕시코 국화인 금잔화(매리골드) 꽃잎으로 덮이게 된다. 그러고 보니 늦가을, 10월 말, 11월 즈음은 범세계적으로 '망자'가 기념되는 시기인 듯하다. 핼러윈(Halloween)도 그중 하나. 망자의 날은 가톨릭 교회의 기념일인 All Saint's day 및 위령의 날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아즈텍 인들이 죽음의 여신 '믹테카키후아틀'에게 바친 제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영화는 멕시코에 사는 소년 미구엘의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에르네스토는 음악을 위해 가족을 저버리고 떠난 후 전설적인 음악인이 된 인물인데 이로 인해 음악이란 것에 환멸을 느낀 고조할머니의 지시 아래 미구엘의 가족에 있어 '음악'은 대대로 금기어, 금지된 장르가 된다.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가문을 일으키는 고조할머니. 완고한 집안의 규율. 여기까지 다분히 클리셰, 좀 상투적이지 않나 싶었다. 미 서부에서의 오랜 거주생활로 인해 히스패닉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의 생활에 대해 친근감을 갖고 있는 필자에게는 라티노, 음악, 가족의 반대 -- 이것은 필연적인 애환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 그 실상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지 부추겨지고 미화된 외부자의 시선이고 강요된 판타지일 뿐이라는 것. 음악이란 예술장르의 실용적 가치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히스패닉, 라티노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생활수준을 고려해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전설의 뮤지션으로 이미 우상화가 이뤄진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고손자 미구엘의 천진난만한 욕망은 제화공으로서의 운명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고조할머니의 엄령은 2대, 3대까지 절대권력으로 지켜진다? 이제 영화가 보여줄 것은 미구엘이 어떻게 이 난제를 극복하고 고조할아버지처럼, 아니 그를 뛰어넘는 위대한 뮤지션이 된다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플롯이 너무 평면적이 아닌가. 영화에 대한 기대가 반감하는 시점이며 지점이었다. 오로지 멕시코라는 제3소재에 편승한 PC(polically correct) 상품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던 찰나였다.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에르네스토, 우상화된 그의 하얀 기타. 그의 기념관. 미구엘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성공적인 데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일대 반전의 생수를 길어 올린다.   


망자들의 세상으로 트랜스포트 되는 미구엘.

친절하지만 쓸쓸한 헥토와의 우연 같지만은 않은 만남.

전설이나 풍속에서 에서 따온 여러 모티프들.

영혼이 없기에 오히려 경계 없는 이동과 넘나듦이 가능한 인간의 친구 개와 고양이.

사후세계의 이동수단 겸 애완동물로 극화된 화려한 민속공예품 알레브리헤르(Alebrije).

영화의 대사는 미국인들에게 친숙한 생활 스페인어 원어가 적절히 곁들여져 현장감을 더한다. 1대, 2대, 3대의 가족이 찰진 밀가루 도우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기능하는 구조. 극 중 인물들의 어투와 몸짓도 지극히 전형적인, 내가 아는 히스패닉들의 모습이다. 반면,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정작 멕시코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들의 문화가 영화의 소재가 되어 조명을 받게 되었다는 점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전통에 기반한 전형적인, 정형화된 그들의 단면, 21세기 사회에서 오히려 벗어나려고 애쓰는 구태와 낯 섬의 지루한 데자뷔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본 영화에 앞서 픽사의 메가 히트, 종신보험 상품 같은 "겨울왕국"의 쇼트 필름이 상영된다. 엘사, 아나, 올라프가 나와 장장 20분이 넘는 프리-쇼 버전으로 '가족'과 '전통'에 대해 설파한다. 크리스마스 시즌, 왕국의 공주들인 그들에게 정작 '전통', 가족만의 특별한 전통이 부재함을 깨닫고 좌절하자 올라프가 나선다. 전통을 수집하고 찾아오겠다고. 올라프는 왕국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가족 전통의 증표와 이야기를 모은다. 결국 그가 내리게 되는 결론은 유형의 것(tangible) 이 아니라 무형의 것 (intagible)에 있다는 것인데..



가장 '무형'이면서 본질적이고 강력한 것은 무엇일까.


제단에 놓인 사진, 금잔화 꽃잎, 종이 도일리, 피냐타, 알리브레히르, 술, 촛불, 공예품 인형,

금박이 입혀진 기타, 번쩍이는 조명, 화려한 영화, 다양한 종류의 구두, 신발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스포일러'를 절대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줄거리에 대해선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려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영리해, 영리해"를 되뇌면서도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제어할 수 없었다.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혹시 깜짝 선물을 숨겨 놓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영화 제작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 한국인의 이름도 많이 보이고 내게 친숙한 이름들, 특별하게 다가오는 모르는 이의 이름들에도 눈길이 갔다. 어떤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인상이 있고 분위기와 느낌이 있고 체취가 있고 감촉이 있지만 결국 유형으로 남는 것은 이름과 (사진으로 새겨지는 순간의) 모습 -- 글자와 시각적 이미지일까. 수많은 이름들을 보면서 그 이름들의 주인공이 제작에서 맡은 각자 역할을 생각해보았다. 캐릭터의 표정 하나, 하나, 멕시코의 풍습과 풍경, 섬세한 고증을 하고 연구를 거쳐 토론하여 이르렀을 분신 같은 그들의 창작물, 인물들. 뜨거운 열정이 녹아든 그들의 고된 작업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지는 스토리와 영상과 음악을 통해 두고두고 기억될 근사한 '유물'로 남게 되었다.



순간을 위해 사는 것인가.
영혼이 있다면, 영원을 위함인가.
무엇을 위한 가치관, 제도이고 관습이며 전통일까.
더 잘 살기 위함일까, 잘 죽기 위함일까.

기억되기 위함일까.


REMEMBER ME.


*  *  *


영화 속 영어 대사 몇 줄을 소개함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Music tore her family apart. Shoes brought them together.” –Miguel

음악은 할머니의 가족을 갈라놓았지만 신발은 도로 이어주었어.


“Seize your moment.” – Ernesto De La Cruz

순간을 잡아라. 만끽해라.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모토.

그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순간의 판단, 순간의 욕망에 몰두했다.)  


“He will listen, he will listen to music.” –De La Cruz

그가 경청할 거야, 음악에 반응할 거야.


“I think it is one of those made up things adults tell kids, like vitamins.” – Miguel

이건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중 하나 같은데, 비타민 (먹어야 한다는 것)처럼.


“Our memories have to be passed down.” – Hector

우리의 추억(기억)들이 전해 져야만 해.


“It has been an honor. I hope you die real soon.”

그동안 즐거웠어. (고마웠어. 영광이었어.) 네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다시 만날 수 있게)


“You don’t’ have to forgive him, but we shouldn’t forget him.” -Miguel

용서할 필요는 없지만 잊지는 말아야지.



* 영화의 마지막 장면. 스포일러를 절대 피하고 싶다면 보지 않는 게 나을 듯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wTumYYjs_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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