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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Nov 22. 2017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살아가는 것의 의미, 사랑의 새로운 고백

지난여름 코엑스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책을 구입했다. 일본에서 200만 부가 팔린 '너.췌'. ‘췌장 신드롬’을 일으킨 서른 후반의 작가 스미노 요루의 데뷔작. 그 소설이 오늘 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원작이다.


처음 책의 제목을 봤을 때 엽기 호러, 고어물인가 의심했다. 벚꽃잎 흩날리는 그림의 표지는 정색을 하며 딴청 중. 맑고 순수한,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낼 뿐이었다.



대체적으로 일본식 '과잉 감성'에 심드렁한 편이다. 대학시절 1년을 공부한 전적으로 인해 얼추 일본어 기본 실력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심하게 녹이 슨 데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일본어 실력이 늘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최 일본어 콘텐츠에 대한 갈증이 없다. 학습을 위해 의식적으로 입력하는 것이 없으니 발전이 없을 수밖에. 그러나 막상 어쩌다, 마지못하여 일본 영화를 한 편 추천받아 보고 나면 기분이 부쩍 가라앉고 시무룩해진다. 뭔가 진하게 와 닿는 게 있기 때문. 정서적으로 공감한다기보다는, 저토록 순수하게 그려내고 싶은 세상이 있을 수 있을까, 허상이라고 믿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이상과 희망에 붙이고 싶은 마음이랄까.


"너.췌"의 애칭으로 불린다는 이 영화도 그랬다. 책은 반쯤 읽다 말았다. 아. 하이틴. 첫 장부터, 그 나이 때의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하이틴 로맨스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분명 뭔가가 있을 듯 하긴 한데. 제목의 비밀은 초반에 이미 나왔다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오산'이었지만. 단순히, 내 췌장이 안 좋으니까 '좋은' 췌장을 먹으면 나을 수 있겠다는 '민간요법'에 근거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는.) 도대체 어떤 반전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이어지는 대사들의 오글거림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재고 따지지 않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강렬한 판타지"



보편적 진리, 정서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했었나, 존재할 수 있을까. 창작과 상상에서나 가능한 것 같은 이상적 환경에의 '회귀'본능. 그게 가상일지라도, 신기하게도 그러한 본능이 있는 듯하다. 그렇게 이 영화 속 클리셰들은 영상의 완성미를 타고 시각중추를 마비시키며 뇌를 점령한다. 서서히. 거기에 플롯과 서사의 힘이 탄력을 더하고 가속도를 입힌다. 영화는 원작 소설과 달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전개 형식을 취하지만 따라가기에 무리가 없다. 


줄거리와 교훈(?): 외톨이 소년에게 찾아온 밝은 햇살 같은 시한부 생명의 소녀. 그 소녀 '벚꽃'은 소년뿐 아니라 또 다른 소녀 (교코)에게도 그녀의 마음, 살아가는 방식을 유산으로 물려준다. 단순한 '연애' 이야기가 아닌 '박애'와 '생명간의 우정'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하다. 


혼자 있으면 알 수 없어.
산다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고 하는 거야.

누군가를 인정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싫어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짜증 난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 누군가를 껴안는다, 누군가와 스쳐 지나간다.... 그게 산다는 거야. 


늘 활달한 기운과 해사한 표정의 벚꽃은 주인공 '시가' 에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엮이지 않고 살아가는 강함"을 갖고 있는 그가 부럽다고 한다. "나는 약하기에 내 슬픔에 너를 끌어당긴 거지만 너는 강하니까 혼자서도 잘 있잖아. 나는 그런 네가 될 수 있을까. 그 용기를 내게 나눠주렴."



진실이냐 도전이냐 '게임'. 


솔직한 말을 하는 것, 진심을 받아들이기 두렵기에 운에 맡기며 주고받는 표현의 유희. 어차피 소멸할 사람, 잃을 사랑과 연인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시가. 그러나 그는 결국 '벚꽃'이 전해준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실천하며 그의 나머지 삶을 살아간다. 


교코와의 우정 구도, 껌 주는 친구의 존재도 귀엽고 좋았으나 '공병 문고'라는 소재는 다소 생소했다.


또 한 명의 심드렁한 평론가가 다음과 같이 일갈하길:


"상상 이상으로 낯간지러운 대사와 설정. 
<러브레터 (1995)>의 담담한 감성 멜로보다 
<눈물이 주르륵 (2006)>의 최루성 멜로에 가깝다."


그러나. 스토리의 힘인가 연출의 힘인가. 후반부로 갈수록 진부한 이야기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고 울림이 커진다. 이 세상 모든 잠언, 특히 인생과 사랑에 관한 경구들은 웬만큼 다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어린 왕자 책 소품, 갑자기 시작되는 폭우, "실례지만 저 좀 울어도 될까요." 충분히 예견된 장면들에서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나의 양옆 자리에는 우연히도 각각 나이 지긋한 남자 관람객이 앉아 있었는데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걸까. 삼분의 이 이상 가득한 관람객들은 영화가 끝나고도,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스크린을 응시한 채 영화의 여운에 젖어 있다. 익숙하다 하더라도, 보존하고 싶은 가치를 담은 서사는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는 것. 영화는 선입견과 심드렁을 따돌리며 뜻밖의 "깊은 감정의 여운"을 남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토록 짜릿한 사랑고백이 또 있을까.


                                                                                   * 


"익숙한 것을 팔려면 혁신적으로 만들고, 혁신적인 것을 팔려면 익숙하게 만들어라."

                                                                                                              --- 데니스 J. 하웁틀리 <히트메이커>


          지난해 들렀던 후쿠오카의 다자이후 텐만구 신사. 너의 이름은. 나의 소원은. 나의 고백은.



감독 츠키카와 쇼 | 장르 드라마, 로맨스 | 상영 시간 115분 | 등급 12세 관람가 | 개봉일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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