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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Oct 12. 2017

[영화] 내 인생 전부가 저 액자 속에

영화 "내 사랑" (원제 Maudie) 의 영어대사로 보는 사랑, 예술

최근 페이스북 친구가 된 '작가(화가)'가 계시는데 이 영화는 전적으로, 지난 여름 우연히 만나뵌 그 분의 '강추' 에 의해서 보게 되었다. 나는 평소 그 분의 그림을 눈여겨 보고 있었고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자유롭게 감상하며 감탄하고 있는 매우 '비겁한' 팬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날 지인 작가분의 뜻밖의 호출을 받고 합석한 자리에서 그 분을 실물로 만나뵙게 되어 내가 상상으로만 품었던 '작품과 작가의 상관관계'에 일치하는 부분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마도 두번째 뵌 자리였던 거 같은데, 그 분이 최근 이 영화를 보았다며 초롱초롱한 눈을 더욱 반짝이며 '강추'하셨다. 추석연휴가 끝난 후 다양한 영화들이 내려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수소문 끝에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오늘 관람하고 왔다. 이제까지 본 영화평들이 칭찬일색, 감성촉촉 이었으므로 커플이 대부분인 관람객들 틈에서 눈물을 흘릴 각오를 하고 갔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 딱 한군데에서만 울컥하는데 그쳤다. 아, 나는 남은 인생에서 저런 사랑'따위'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나보다, 하고 나 자신을 포기하려던 찰라 엔딩 크레딧에서 재밌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영화 제작에 있어 어떤 동물도 희생되지 않았습니다. (no animals have been harmed in the making of this movie.)" 여기서 더욱 뭉클했다. 샐리 호킨스와 이단 호크의 연기는 전혀 전형적이지 않으면서 탁월했는데 동물들 마저도 완벽한 연기를 한 것이다.

완벽한 '비폭력' 으로 느리고 천천히 담담한 감성을 꽉 채워준, 특히 주인공들의 연기와 연출의 미가 탁월했던 이 잔잔하고 사랑스러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쓰지 않으면 왠지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 영어표현들로 풀어보고자 한다. 혹시나 하는 바람으로. 


Mrs. Lewis -- Maude Lewis.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과 함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서른중반의 주인공 모드 (Maud. 애칭으로 Maudie)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집을 재빨리 처분한 '돈 밝히는' 오빠와 냉랭한 고모(aunt)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어느날 단골가게에 들렀다가 '에버렛' 이란 수산업 노동자 (fish peddler)가 '입주 가정부'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찾아가 적극적인 구직의사를 표명한다. 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에버렛은 "I'm looking for a woman" 이라며 모드에게 모욕을 주기도 하고, 고용주가 된 후에도 집안의 서열 운운하며 (그녀가 개, 닭보다 못한 처지라고 강조한다) 한껏 위세를 부리지만 모드는 굴하지 않고 상냥하고 당당하게, 때로는 당찬 의사표현으로 에버렛에 맞서기도 하며 자신의 위치를 찾아간다. 시종일관 밝고 긍정적인 모드의 태도에 큰 울림이 있다. 에버렛은 불평하면서도, 그의 삶 안으로 스미어 들어오는 모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에버렛과는 달리 글, 그림에 능하고 사리분별이 바르고 모드. 좁은 집,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며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유지하던 그들이기에 모드는 에버렛에게 결혼을 '요구'하며 그림에 모드 루이스, 라고 서명을 넣기 시작한다. "어, 거기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거 같은데." 라고 지적하는 에버렛. 원래 모드의 성은 다울리 ( Dowley), 즉 모드 다울리인데 언제부턴가 '모드 루이스', 라고 그려 넣고 있었던 것. 에버렛의 부인, Mrs. Lewis 가 되고픈 소망의 발로인 것이다. 그런 모드에게 거친 말과 표현, 행동으로 시시때때로 모욕감을 안겨주던 에버렛도 그들의 '공생'관계가 주는 유익에 수긍하며 결국 식을 올리게 된다. 


모드와 에버렛의 대화를 살펴보면 모드의 밝고 긍정적인 성정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꽉 막힌 듯 하지만 합리적이며, 실용적으로 풀어나가는 에버렛의 변천사를 알아차리며 그들 안에 싹 트는 '사랑'을 숨죽이며 지켜보게 된다.



Suits me.


그들의 첫 대면. 당신, 무슨 일을 하는데 (하는 일이 뭔데), 모드는 에버렛에게 What is it (that) you do? 라고 물으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 처음 에버렛이 입주 가정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가게 벽보에 붙이도록 하자 (가게 주인에게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보아 에버렛은 글을 모르는 듯) 모드는 광고쪽지를 아예 낚아채어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다른 잠재 구직자를 배제하여 본인이 그 일을 쟁취하겠다는 의지. 순발력을 발휘하여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동작의 불편함에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모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그녀. 사람들이 그녀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맑고 순수한 에너지가 그림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다리도 절룩거리면서 ('cripppled' 등 적나라한 단어를 사용해 모드를 장애인 취급한다) 마당에 돌아다니는 개보다도 밥값을 못할 거라는 둥 모드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모드는 이에 전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로운 태도로 에버렛을 설득한다. 싱글싱글 웃으며, You do need help. I can see that. (가만 보니) 당신, 도움이 필요한 거 맞는데요. 그리 보이는데요, 라고 말한다. 모드 특유의, 초월한 듯한, 말 끝에 덧붙이는 미소가 있다. 그 속에서, 오랜 기간의 고통을 지나 온, 그러나 기꺼이 좌절하지 않은 인내와 함께 승화시킨 희망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자칫 비굴해보이기가 쉬울텐데, 모드는 절대적으로 여유롭고 우아하다. 일이나 상황이 의도했던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도 모드는 "Suits me." (불만 없지. -- 난 괜찮아. 이대로 어울리는걸.) 한마디 하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My whole life is already framed right there.


그녀의 그림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구입하겠다는 '뉴욕에서 온' 산드라에게 모드가 말한다. 마을에서 동떨어진 외딴 곳에 살면서 문화적 자극을 받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의 '기억' 에 의지하여 그림을 그리는 모드는 표현해내지 않는 아픔과 고통, 소외와 외로움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승화하여 틀 안에 담는다. 완벽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그림 속 세상에서 그녀는 계절, 색감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가 무한한 자유함을 원색 그대로 담는다. Frame, framed 라 함은 제한된 영역(에 갇혀 있다)의 의미가 있고 '무고한 사람을 유죄처럼 보이게 하다' 처럼 부정적인 함의로써 틀 안에 가두다, 라는 뜻이다. 하지만 모드는 그 안에서 더할 나위없이 유능하다. 그녀가 전지전능함을 경험하는 공간이다. 광고쪽지를 독점함으로써 에버렛과의 만남을 '필연'으로 만들었듯이 그녀는 그림이라는 영토 안에서 그녀의 운명, 삶의 방향을 창조하고 조율하며 받아들인다. 창작이란, 예술이란 그런 의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나에게도) 창작의 의욕과 욕구를 불러일으킨 대목이다.   



What makes you tick?


그렇다. 당신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은 무엇인지. 추억이 담겨 있는 선친의 집이든 뭐든 팔아치우는 모드의 오빠처럼 그것은 '돈' 인가. 마을사람들이 모드를 '에버렛의 섹스노예'라고 수근댄다며 쯧쯧, 혀를 차는 모드의 숙모처럼 명예와 소문인가. (나중에는 모드에게 "You are the only one in the family who ended up happy." 라고 말한다. 공허한 느낌이다.) 에버렛에게는 무엇이었을까. 모드에게는 또 무엇이었을까. 똑딱똑딱 (tic-tac) 시계처럼 돌아가는 일상을 기능하기 위해, 현존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이 당신을 살아있게 만들고 숨쉬게 하는가. 이 영화에서 어떤 상징처럼 등장하는, 근사한 미장센을 만들어주는 '부두'와 '수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먼 시선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모드와 에버렛이 부둣가를 지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같은 장소, 같은 길을 반복하려면 어떤 힘이 있어야 할까. 주로 생선을 담아 운반하고 배달하는 에버렛의 수레 안에 만면에 웃음 가득한 모드가 타고 있다. 무엇을 담고 무엇과 동행해야 하는가.


모드의 마지막 말은, "I was loved"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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