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힘 (매력자본)은 무엇이고, 나를 끌어당기는 매력자본은.
사랑이란 힘의 관계이다. 힘의 이동이다. 이렇게 던져 놓고, 힘의 정의를 들여다본다.
물리학에서 힘(프랑스어, 영어: Force, 독일어: Kraft, 이탈리아어: Forza, 스페인어: Fuerza)은 물체의 운동, 방향 또는 구조를 변화시키는 원인이다. 다른 말로, 힘은 질량을 가진 물체의 속도를 변화시키는 요인(정지 상태의 이동을 시작하는 것 포함)이며, 즉 물체를 가속시키거나 신축성이 있는 물체는 변형시킬 수 있고, 가속과 변형 둘 다 일어날 수도 있다. 또한 힘은 밀리거나 밀어내는 것이라는 직관적인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힘은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졌기 때문에 벡터량으로 표현한다. 힘은 뉴턴이라는 국제단위계로 측정되며 F라는 기호로 표현한다.
거창하게 말을 꺼냈지만, 사랑이 어떤 추동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전에 몇가지 전제가 있는데.
1.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끌리는' 것은 '좋아한다' 라고 정의한다. 자연적인 현상이고 (개체가 타고난, 성숙과 숙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발'되는 고유의 조건- 컨디션- 시스템에 기반하여) 이는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다. 나의 유전인자나 사고, 가치관이 정해준 정해진 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의지'라는 것이 작동하지 않는 한 그쪽으로 경도되는 것이다.
2. 이에 비해 '사랑'은, '사랑' 하는 것은 다르다. 사랑은 '의지' 이다. 흔한 예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이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책임을 정하고,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게 그 대상에 대한 헌신을 약속한 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만한 축복이 어디 있을까.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기에 어떤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통이 뒤따를지라도 그것은 즐거움으로 치환될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좋아하지 않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건 본능에 이끌린 자연스러운 것,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형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직장상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동료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친구관계를 유지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은 '의지'를 발휘해서 '사랑'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이다.
3. '좋아함' 은 파동이다. 잔잔한 일상을 뒤흔들 물결이 일려면 어떤 '힘' 이 작용해야 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올라오려면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요인이 필요하고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힘'에 반응한다. 외모의 힘, 몸짓의 힘, 목소리의 힘.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있고 유독 나한테만 씌어지는 마법같은 힘도 있다. 나를 잡아끄는 뭔가가 열심히 작동한 결과로 설렘이라던가 긴장 같은 감정의 움직임이 일게 된다. 불러 세워진 힘, 에너지는 불러 세운 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잠잠히 또는 격렬하게 흘러서 가닿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어떤 힘이 느껴지는 사람이 좋다. 신체적인 것 보다는 정신적, 내부의 힘인데 그것이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힘이라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요란하지 않지만 단단하고 일정한 진동. 일관된 물결. 세상에 하나 뿐인 고유한 리듬. 누구에게나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말할 나위 없이 더 특별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보편적인 힘은 보편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보편적인 매력은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두루 작용하게 된다. 난무하는 보편성 속에서 의미를 길어올리고 이름을 지어주고 온기를 부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4. 그리하여 사랑, 이라는 것, 여기서 엄밀히 구분하자면 '좋아한다는 것' 은 알랭 바디유 등이 말했듯 일종의 투사이다. 내가 원하는 특정 방향으로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듯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도 (투사하고 '싶어할' 수) 있고, 내게 결핍된 어떤 것, 내게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을 맹종하여 그것과의 만남이나 결합을 간절히 원할 수도 있다. 즉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는 것이다.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대적인 평가이므로) 자신이 인식하는 자신, 그에 대한 모종의 평가 안에서 타자를 바라보게 되고 어떤 타자들과의 유대관계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 한다는 행위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그 사람에게서 보고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찾아내거나 발견하여 의무부여를 해서') 사랑, 아니 '좋아함' 에 빠지는 것이다.
5. 예컨대 나는 당장 완성된 것에서 취득할 수 있는 이득보다 '어리숙'하고 우직함이 주는 여백과 가능성을 사랑하는 편이다. (아니, '좋아'하는 편이다.) 나 자신도 유려하고 미끈매끈한 사람이 되기 싫다는 지향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더라도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유독 '영악한' 사람들, 심리전을 잘 구사하는 사람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의도적으로 조정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도에 민감했던 나는 상대적으로 '백치미'가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뚜렷한 목표와 의도 없이 부서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 하지만 개별적 '매력'의 지점으로 이어지기엔 그 안에 어떤 '힘'이 있어야 했다. 그 힘이란, 어떤 특별한 재능 그리고 '자아의 힘' 과의 조합이다. 누구에게나 고유한 재능, 재능의 조합은 존재하는 것인데 '자아의 힘' 이 매력적인 사람은 흔치 않다. 스스로에 대한 존엄(dignity) '인식 내지는 의식' (awareness, recognition)이라 할까, 그리고 타자를 향한 마찬가지 강도의 존중, 그 둘의 합체된 힘. 인간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의 '현실감' , 그러니까 '현존감' 같은 것. 그것에 매료된다. 예전에 전자공학과 다닐 때 노란 케이스의 계산기 모양의 플루크 (Fluke) 란 기계가 있었다. 전기계측장비라고 해야 하나. 나의 플루크는 '자아'의 강도가 지닌 자력에 반응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 에 비견되는, 함께 어우러질만한 강도의 힘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의 자원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웃거리지 않는 자존성과 독립성을 갖추었을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6. '끌림' 에 있어 작용하는 추상적인 힘, 힘의 요소에 대해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두루뭉술하게 접근해보았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힘이 존재한다. 특히나 매력(이란 것의)의 힘에 있어서는. '매력'이란 것이 타자에 '어필'하는 데 있어 필요한 '자본' 의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매력자본'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캐더린 하킴의 공저 "매력자본: 매력을 무기로 성공한 사람들" 에서는 매력자본을 '외모자본' 에 국한시키고 있다. 내 생각에, 외모, '생물학적 구성'은 한 사람의 매력을 이루는 지표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고 본다. 한 인간이 타고 난, 획득한 매력자본에는 외모자본 외에도 경제자본, 권력과 권위의 자본 등등 다양한 요소가 있을 수 있고 각각의 요소들은 서로 밀접하거나 느슨하거나 서로 연결되어 작용하고 있다. 누가 봐도 타고난 외모의 '우성'을 가진 여성의 예를 들어보자. 적당히 작고 갸름한 얼굴에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조화롭고 매끈한 피부와 풍성한 머릿카락을 가진 여성이다. 이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났다. 진화인류학에서의 '매력적인 외모' 란 종족의 번식에 최적화된 생체조건을 의미한다. 이럴 경우 대개는, 부모가 가진 '양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테고 그런 유전자를 조합한 부모라면 이미 '성공한' 사회구성원일 가능성이 크다. (경제력 있는 아버지가 매력적인 외모의 여성을 배우자로 만나 다음 세대의 '외모' 개선이 이루어지고 호혜로운 성장환경에 의해 좋은 발육이 이뤄졌다는 가정) 하지만 이 여성에게 내부요인, 즉 성격과 성향적으로 어떤 '부정적' 요소가 있었다고 치자. 유년기, 청년기를 거치며 모든 것이 극한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치달았다고 가정해보자. 결과적으로 그러한 요인과 상황은 그녀가 '타고난 우수한' 외모 요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부정적 사고에 집착하여 나타나는 암울한 인상, 불균형적인 생활습관으로 인한 부조화가 외모의 여기저기에 반영되어가기 마련이다. 골격상으로는 변함없는 미인이라 할 수 있을 지라도 30대 이후의 그녀는 '매력적'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빛을 잃은 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화 되어가는 그녀의 '매력자본' 은 이렇듯 다른 '자본'과 '자원'들과 밀접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외모지상주의, 라는 말이 유행하고 외모로 '차별' 받는 여성들의 반발과 반박이 강해지면서 남성들에 대한 외모 잣대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타고난 '아름다움'은 출발선상에서의 우위를 제공해주지만 '가꿔지고 만들어진' 아름다움의 추격속도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에 작동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경제력' 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돈이 외모를 만들고 분위기를 만들고 아우라, 후광을 부여한다. 실질적이고 실체적인 효과이다. 전세계적으로도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피부과, 성형외과가 흥행하고, '외모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가성비 최고의 상품 발굴을 위해 발품을 팔고 미묘한 품질의 차이를 위해 남들은 엄두내지 못하는 고가의 상품을 발굴하고 소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경제력을 동원하는 가치구조가 아닌가.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경쟁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무엇이 진정한 본질이고 승리인지 헷갈리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경쟁이 욕망을 낳고 죄의 씨앗이 되는 사회이다. 경쟁은 속도감을 요구한다. 속도가 경쟁이다. 그런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오직 결과만을 보도록 강요 받는다.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다. 경쟁하느라 바쁘므로. 그리하여 매력의 과정은 알 수가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오로지 매력의 결과에 의해 끌림 당하고 끌어오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다.
7. 지위란, 권위란 그런 맥락에서, 그것이 '경제력'을 보장하게 되고 해당 함의의 등식을 의미하는 한 그 자체로 충분한 매력자본의 '상징'이자 표징이 될 수 있다. 매력자본을 키울 수 있는 동력인 '돈'이거나 '상품'을 제공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자체로 막강한 '매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당신과 친밀하고 은밀히 결합한다는 것은 나의 매력을 증진시키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어서 당신은 나에게 매우 매력적인 매력자본의 '조건'을 지닌 잠재적 상대가 된다. 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저항 없이 이 공식을 따른다. 위험한 '자아'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다시 한 번 말해, 사람들은 매력있는 상대방에게 끌리지만 그것은 상대방으로 인해 나 또한 (내가 정의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기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계에 있어서의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러한 상대를 좋아하는 것, 좋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상대를 통해 나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싶고 그런 나를 더 좋아하기 위해서, 일지 모른다. '위험한' 자아, 스스로 강하고 매력적인 자아가 되려는 노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8. 끌림은 힘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자아의 강도에 반응한다, 고 했다. 사람마다 '힘'의 정의와 선호도가 다 다르다. 저마다 가진 힘이 다 다르고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필요'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돈, 경제력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들은 (사회적)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가장 극단의 생존수단, 그것은 '문명'사회에서 '돈'이기 때문이다. (원시사회라면 돈이라는 매개체 대신 보다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매력이 통할 것이다.) 좋아함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돈'에 문제가 생기면 그 관계는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몹시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둘이 만나 식사를 하고 기타 활동을 하는데 있어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기꺼이 비용을 부담한다고 치자. 좀 더 극적인 대비를 위해, 이 커플의 소비와 지출수준이 좀 높은 편이었다 가정하자. 그러다가 어떤 내적,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그 시스템에 대한 변형이 초래되게 되었다. 비용부담을 분배해야 할 상황이 왔다. 현실을 명확히 들여다보자. 이때 대개는 관계자체가 깨어지게 되어 있다.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이제까지 모든 비용을 아낌없이 지불한 상대이다. 그만큼 경제적 능력이 된다는 데 대한 상호이해와 합의가 되었던 것이고. 하지만 그것이 깨어질 때 '사랑' 과 호의에의 원초적인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런 부분을 좋아하며 관계를 '시작'했고 그렇게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그래요, 앞으론 나도 부담할게요, 내가 낼게요, 라는 입장의 전환이 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진행된 관계였다는 것은 그렇게 지속될 때 '사랑' 또는 '끌림' 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불균형으로 시작된 관계는 불균형이 깨어질 때 지속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여기에, 현대사회에서 절대 배제할 수 없는 돈, 이라는 것에 의해 지불과 보상심리라는 '순수한' 감정 외의 것들이 마구 끼어들기 시작한다.
9. '끌림의 힘'에 있어서 순수함을 찾고 싶은가. 힘의 이동에 있어 훼손되지 않은 가치를 발견하고 싶은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듯 힘은 팽배한 곳으로부터 해소될만한 구석으로 이동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힘은 결핍을 알아보고 결핍은 힘을 발견하며 욕망한다. 절박함과 간절함이 깃들여진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강력한 끌림이 된다. 당신의 매력자본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상대방의 매력자본은. 당신이 추구하는 당신의 매력자본을 더욱 강화해줄 상대방의 자원은. 끌림의 힘, 끄는 힘은 무엇인가. 당신의 어떤 결핍은 어떠한 힘을 필요로 하는가. 아니, 결핍을 채우기 위한 이끌림인가, 나눠주고 싶은 연민의 행위인가. 전자의 역할에 좀 더 충실한 이가 있겠고 후자에 경도된 이가 있을 것이다. '자아의 강도'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힘의 법칙 속에서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알아보기를 원하며, 자신이 일으키는 파동과 대상으로부터 오는 진동에 신중히 반응할 것이다. '성숙한(성숙하고자하는)' 의지를 반영하는 반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초적, 근원적이고 단순할 수록 더 매력적일 수 있는 '끌림' 이란 것. 자신의 결핍을 진단해보고 자아의 강도를 인식한다면 스스로를 '기만'하는 '끌림' 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만이 주는 유익과 황홀함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끌림의 관계 를 '결핍이 초래한 결탁',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듯 하지만, 사회관계적, 정치적 복합, 복잡성은 차치하고 일단 이렇게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