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나야 나
20230301.화 / 요11:28-44
> 묵상
예수님이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마르다도 그랬고 마리아도 그렇고 ‘예수님이 있었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거(21,32)’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예수님이 죽음을 막고 지연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런데 그들은 믿지 못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을 다시 살리실 거라는 것은 믿지 못했다.
그럴만도 하다. 나사로는 이미 부패하고 있었으니까 (39)
시신을 본적이 있다. 어머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봤다.
그리고 부패한 시신도 봤다. 작은 시누가 그랬다.
장사지내기 위해 맑게 화장된 시신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히 믿을 수 없다.
그런데 부패한 작은 시누의 시신이 일어난다니.. 냄새가 난다는 것은 이미 형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건데 말이다.
예수님이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 앞에서
그들이 믿지 못하는 죽음 이후의 부활을 나사로에게 경험시키시며 믿지 못하는 것들의 영역이 무너뜨려 주셨다.
성경에 이토록 정성껏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데 나또한 경계 안에서만 믿고 경계 너머는 믿지 못하는 마리아, 마르다 같은 자다.
그녀들처럼 차라리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면서 우는건 소망이라도 있는 거 같다.
나의 소망은 대부분 말라 없어진게 아닐까 싶다.
죽은것이 부활하는 믿을 수 없는 것의 경계는 바로 남편의 변화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에 대한 변화 자체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데 바라니 나는 곤고하다.
곤고함은 너무 오래토록 굳어져 나는 이제 바라지만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어 더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봐도 ‘죽지 아니할 수 있었어요!!’하고 울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진짜 죽어서 부패해 버렸는데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누군가의 변화가 아니라
내 시선의 욕망인 ‘사람이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죽어버린 나사로가 살아나는 변화가 아니라
죽어버린 나사로는 살아날 수 없다고 믿은 나의 믿음의 변화
나사로는 그대로 죽어도 예수님 믿고 천국 갔을거다 그러니 다시 살아나서 기쁘고 영광이긴 하지만
진짜 영광은 나사로를 둘러싼 주변에 있던 사람들
나사로만을 바라보며 ‘쟤는 죽었어! 쟤는 못 살아나!’하던 사고에서 머무르던 상태가 허물어진
나사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광이고 그들의 구원의 문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바로 곧 나이고 말이다.
> 삶
1.남편의 변화가 아니라 남편이 변해야 한다는 나의 잘못된 집념을 바라보고 회개하겠습니다.
2.말씀을 통해 완고한 경계를 알고 허물어 트리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
> 기도
하나님, 나사로가 안죽을 수는 있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나진 못해요! 라고 말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 나사로가 부활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주님,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경계를 둔 믿음을 안타까워 하시고 경계를 허물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전 말씀을 보며 일련의 과정들이 절 위한 구원의 역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 말씀이 아니였다면 몰랐을 것들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깨달음이 세상의 지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게 하심이 감사합니다. 나의 근원이 하나님 이심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주님. 모든 말씀 죽은 것들 속에서 살아남을 피워낼 수 있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