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했네
"내가 많이 힘들어요." 내지 "나는 슬퍼요."란 말을 가까운 이에게 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턱까지 꾸역꾸역 차고 올라와 나라는 경계를 넘어갈 때 쯤 그 말들을 겨우겨우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변 가까운 이들이 넉넉치 않아서가 아닌 스스로 멈칫이 된다.
꽤나 많은 생각들이 감정을 압도해 버리기 일쑤인데 그러면 그 순간 멈칫이 되고
결국 슬프고 힘들다는 말들은 사라져 버리곤 없다.
어젠 뜰에와 대화를 나누다가 공감받는 것이 굳이 왜 편하지 않은가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그건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드는 알아짐이었다.
뜰에가 말하길
"엄마, 공감을 너무 하는거 말야. 그 공감안에 공기가 없잖아. 공기가 있어야 산소가 있어서 숨을 쉬는데 나는 그래서 공감받는게 힘들어. 내가 말하는 건 그냥 말하는 거니까 듣고 있으면 되는건데 왜 공감을 해서 숨 막히게 하는 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순간 알았다.
'아, 어떤 이야기가 나로부터 나와 상대를 향해 갈 때 어떠한 공감은 청자의 공감만이 가득차 있어서 여백이 없는 거구나.'
눈썹을 오므리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야기를 들어 준다거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 알겠다는 제스쳐를 보이거나
굳이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굳이 그런식들의 반응을 보여서 내가 경험한 상황에 어떤 감정이 짙어져 버리거나
그런 것들이 불편하다.
그냥 가볍게 듣고 있다는 걸 아는 정도면 되는거다.
그리고 결국 난, 나에게서 나온 얘기가 상대방에게 들어가 어떤 작용을 하고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불편한 걸 보면 꽤나 많은 것들이 '이러지 않은 걸 별로야.'라고 정해두고 있는 사람인데 싶다.
그래서 힘들고 슬픈게 꾸역꾸역 찼는데,
터지는 부분도 있었고 터졌다 다시 아물어가는 부분도 있는데
아프고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따위들을 다루기에 가장 좋은 건
결국 나를 보살피는 거다.
그게 나한테는 머무는 공간을 아껴주는 것이고,
피로감을 푸는 반신욕을 하거나 오일램프 향을 맡는 거거나
작은 마당에 나가 뾱뾱 올라오는 아스파라거스를 보고
이제 꽃이 피여하는 하늘하늘 거리는 잎을 가져와 방에 꽂아 두는 것,
마지막을 향해가는 쪼그래진 블루베리를 따고,
바질을 수확해 말리는 과정 같은 것들이다
자연과 손과 발이 가는 것들에는 놀라운 정화작용이 있는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