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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Jul 26. 2021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제때 화는 내야지

긍정의 서재 책 <좋은 사람 콤플렉스>

 설악산 공룡능선에 다녀온 다음 날이었다. 13시간에 달하는 장거리 산행 때문에 온몸을 얻어맞은  아팠다. 지난밤,   잠까지 몰아 자느라 늦은 아침잠에서 깼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지갑 잃어버리셨어요?” 하고 물었다. 젊은 남자였다. 나는 '그럴 리가 없는데' 하다가 그러고 보니 어제 택시를 타고 집에  이후 지갑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색 카드 지갑이요?" 하고 묻자 그렇다며, 어젯밤 택시에서 주웠다고 했다. 나는 연신 '감사하다' 말을 덧붙이면서 어떻게 지갑을 받으면 좋을지 물었다.


 그는 청량리 부근에 산다고 했다. 나는 성남에 있다고 말하자 "성남 사시는데 서울 택시를 타셨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곤 "제가 정신이 없었네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제 술 마시셨어요?"하고 난데없는 질문을 했다. '뭐 이런 걸 물어본담?' 싶었지만, 공손해야 하는 쪽은 나이기에 "아, 아뇨"하고 짧게 답했다. 택배로 받을 수 있냐고, 주변에 편의점 택배가 있으면 그걸로 보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gs 편의점에서 점포에서 점포로 보내는 택배는 운임비가 일반 택배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재택근무 기간이니 급히 받아야 할 일도 없고. 근데 수화기 너머 남자는 "아.." 하면서 애매한 듯 말을 끌었다.

 ‘사례가 받고 싶은 건가?’ 싶었다. 혹시 '근처에 편의점이 없나?', '아님 귀찮아서 그런가?' 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자 그는 차라리 퀵같은 걸 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가는 퀵을 알아보자 3만원이라고 했다. 옆에서 듣던 남자친구는 굳이 뭐하러 3만원을 거기다 쓰냐며 통화 중인 나를 말렸다. 집에 가는 길에 들러서 가지러 가면 될 것 같다기에 같이 그의 집으로 향하기로 하고 6시 반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이 지갑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쉽게 주기로 한 것 같다며 지갑 안에 뭐가 있는지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카드 지갑이기에 카드 몇 장과 2천원 지폐, 명함 정도가 들어있는 것 같다고 하자 현금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컬러의 카드인지 그 카드 회사명과 커피 쿠폰까지 일일이 하나씩 묻고 확인하기 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뭐하는 인간이지?' 싶었지만, 또 무시했다.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지' 싶었다.


 6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는데 그는 다시 4시까지 올 수 없냐고 재차 전화를 걸어왔다. 협의 끝에 4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출발할 때도 전화를 달라고 했는데 나는 순순히 그의 요구를 따랐다. 굳이 내키지 않으면 문자만 남기고 가도 될 걸 전화를 한 번 걸었다가 안 받기에 문자를 남겨놓았더니,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뭐하느라 전화를 놓쳤다고, 지금 어디인지 위치를 묻기에 성수대교라며 금방 도착할 거 같다고 하면서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면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위로 올라오시면 된다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당황한 나는 "위로요? 아 네..."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친구는 "위로 올라오래? 이상하네. 굳이 왜 올라가? 그 사람 보고 내려오라고 해"하고 말했다. 나는 지갑을 주워준 사람에게 고마운 건 맞는데 상대가 요구하는 걸 어디까지 수긍해야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럼 도착했을 때 내려오라고 해야겠다!" 하고선 커피 키프티콘 정도로 고마움을 표현하면 될 것 같다고 남자친구에게 얘기했다. 도착하고서 5분쯤 지났을까. 어슬렁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놀이터 쪽에 있다고 했는데도 전화를 해서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는 내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이거 맞으세요?"하고 물었다. 나는 맞다고, 감사하다고 하면서 "감사해서 기프티콘 같은 거 드릴까 하고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떤 거 주시게요?"하고 물었다. 나는 "커피나 뭐, 케이크.."하고 말하자 쌩하니 상가 쪽으로 가버렸다.

 그러더니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뭐지?'싶어 남자친구 차 근처에서 남자친구를 쳐다보았다. 남자친구는 "왜?"하고 묻는데  동시에 지갑을 주워준 그가 멀리서 이리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파란색 신한은행 ATM 기계가 보였다. 나는 '헉 저 사람 지금 돈을 바라는 건가?'하고 겁이 났는데 순진하게 일단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기 카페가 있다면서 커피를 사준다고 했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하고서 키오스크 기계 앞에 섰다.

‘가성비 좋은 커피로 기프티콘을 대체하면 되겠다’ 싶은 얄팍한 계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 것까지 커피를 사야 하나 잠시 고민스러웠다. 은연중에 커피를 시키면서 ‘남자친구와 함께 왔다고 얘기해야 하나’ 싶었다. 대용량 커피이기에 ‘하나만 사서 남자친구랑 나눠마셔야겠다’ 생각하고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시켰다. 커피는 초스피드로 나왔는데, 내가 빨대를 꽂으면서 커피를 건네려고 했는데 그는 뒤에서 "먼저 드세요" 하면서 내 옆구리를 슬쩍 만졌다.

 너무 당황한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는데, 흔들리는 동공을 가리기 위해 시선을 커피로 떨구곤 "아니에요, 먼저 드세요"하면서 커피를 건넸다. 나는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곤, 차로 돌아가면서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어요?"하고 묻는 그 사람 말에 "남자친구가 태워줬어요" 하고 가보겠다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불쾌한 일을 당해버려서 차에서 기다리던 남자친구에게 방금 당한 일을 빠르게 얘기했다. 남자친구는 "옆구리를 만졌다고?" 하면서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혹시 모르니까 번호도 차단해놔”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주말에 겪은 일은 주말이 끝나고, 한주가 지나도록 나를 괴롭혔다. ‘왜 제때 화를 못 냈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하고 화낼 걸’, ‘지금 제 허리 만지셨어요?’ 하고 물었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두 살 터울의 오빠에게 얘기하자 그런 상황에 화내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며 갑자기 낯선 남자인 척 상황극을 해서 웃어 버렸지만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 일로 내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 건지 스스로 되묻게 되었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도 화를 내는 게 두려워 감정을 숨기고, 착한 사람으로 남고자 무던히 애쓰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과의 관계에선 특히 나약해졌다. 어릴 때부터 오빠와의 관계에서 화를 내면 갈등이 더 커진다고 몸이 기억하는 탓에 화가 나면 본능적으로 감정을 숨기고 평온한 척 애썼다. 스스로 감정을 속인 탓에 제때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다. 고장 난 감정 시스템은 사회에서 만난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했다.

 '이런 답답한 내 성격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하던 중 책 <좋은 사람 콤플렉스>을 읽게 되었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하고, 화를 내더라도 착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위로한다. 오히려 원하는 바를 말하고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며 건전하게 화를 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책을 읽으며 지난 한 해동안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일 때마다 냉소로 일관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무시와 냉소로 일관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내 안에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왜 그렇게 마음에 미련이 남는 걸까' 고민스러웠는데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 안에 남은 분노는 사과받아야 했을 때 상대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해서였다. 작가는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사건'에 대한 해결방법도 제안한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소리치라던가, 분노의 감정을 글로 쓰고 이를 불로 태우거나 쪽지를 화분에 묻어버리라고 조언한다. 그중 인상 깊었던 제안은 원한을 떨쳐버리고 싶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상대를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인정하면 역설적으로 날려버리려는 의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야 내 문제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화를 표현하고 상대에게 어떻게 사과를 요구해야 하는지 배운 기분이다. 여전히 기분 나쁜 일에 대응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 안의 감정을 믿고 나아가 보려 한다. 더 이상 상처 받고 홀로 끙끙대지 않기 위해서.



*위 글에 공감하신 분들께 작가 듀크 로빈슨의 책 <좋은 사람 콤플렉스>와 함께 작가 히라키 노리코의 책 <참지 않을 용기>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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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Photo by Hello I'm Ni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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