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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Aug 29. 2021

나의 노든, 외할머니

긍정의 서재 책리뷰 동화책 <긴긴밤>

 어릴  여름 방학이면   터울의 오빠와 함께 남양주에 있는 외할머니댁에서 방학을 보냈다. 여름 방학의 저녁 풍경은 부엌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와 할머니가 틀어놓은 <6  고향> 티비 소리가 코와 귀를 간지럽힌다. 할머니의 부엌 찬장엔 수채화  색색깔 자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거기다 밥을 소복이 담고, 스댕 그릇에 국을  부엌 바닥위에 장미꽃이  놓인 밥상을 펴놓고 식사를 하곤 했다. 무섭게 생긴 외할아버지와  옆엔 까만 파마머리를  외할머니, 어린 오빠와 내가 삼촌 옆에서 수저를 뜨며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파와 감자를 송송 썰어 넣은 감잣국에 스팸 햄을 두툼하게 썰어 구워주시곤 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간장에 절인 깻잎 반찬, 짭짤한 오이지 그리고 집 앞에 김장독에서 꺼내온 아삭한 김치 맛이 아른거린다. 그때 가족들의 매 끼니를 담당하는 할머니는 내 눈에 완벽한 어른처럼 보였다. 잘 짜인 요리를 내놓는 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방학이면 낮에는 숙제하고, 시간이 남으면 이른 아침 포도밭으로 떠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밭에 놀러 가도 되는지 물었다. 밭에 가면 달려드는 꿀벌을 피해 밭일을 돕곤 했다. 썩은 포도알을 솎아내는 일이었던 것 같다. 밭에 못 가는 날이면 오빠와 개울가에서 설익은 대추를  따다가 돌로 찧어 물병에 담는 소꿉놀이를 했다. 개울가에 하루 동안 담가두면 숙성이 된다고 하면서.

 믿을만한 구석이 오빠뿐이었던 나는 오빠 뒤를 종종 따라다녔다. 그러면 오빠가 방문을 쾅 닫으면 발을 찧는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같이 혼을 냈다. 낮에는 오빠와 신나게 놀다가도 밤이 되면 무서웠다. 할머니네에서 어색한 동거를 시작할 때면 가끔 꿈에서 엄마가 죽는 꿈을 꿨다. 그런 날은 잠에서 깨 엉엉 울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른스럽게 달래주곤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새벽에 외할아버지가 자다가 깬 내가 울면 놀란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해 발을 동동 굴렀다는 이야기는 다 커서 알게 되었다. 방학 동안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부모 노릇을 대신했다.

 쓰당 멤버인 로사 언니의 추천 동화책 <긴긴밤>에는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가 나온다. 치쿠는 동물원이 폭격을 맞은 틈을 타 어미를 잃은 펭귄알을 양동이에 가지고 동물원 밖으로 나선다. 도망치던 중 흰바위 코뿔소 노든을 만나 함께 바다로 향하기 시작한다. 치쿠는 힘든 와중에도 펭귄알이 담긴 양동이를 애지중지 이고 지면서 알에서 새끼 펭귄이 깨어나오도록 돕는다. 치쿠가 생을 마감하고, 노든은 치쿠의 부탁을 잊지 않고, 어린 펭귄을 돌본다.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고, 수영을 배우도록 도우며 어떻게든 자기 앞에 놓인 어린 존재가 제 앞가림을 하도록 돌보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적엔 나보다 키도 크고, 아는 것도 많다고 여겼던 할머니는 여든넷의 노인이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내가 열 살쯤 돌아가신 뒤로 할머니는 삼촌과 둘이서 한 집에 살았다. 엄마와 이모는 내가 열두 살이던 해에 할머니네 집 옆 계곡에서 식당을 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된 무렵 할머니의 키를 넘어섰다. 할머니는 여름마다 엄마의 가게를 도와주었는데, 해가 지날수록 내가 커지는 만큼 할머니의 체구가 쪼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방에서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자잘한 일을 담당했다. 오이나 방울토마토, 마늘을 써는 일이나 쌈장을 담고 고추를 가지런히 담아 손님상에 나갈 반찬을 준비하는 일을 도왔다. 나는 옆에서 할머니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했고, 할머니는 곁에서 칼질하는 나를 보며 손을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며 항상 불안해하셨다.

 어느 날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궁금해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할머니가 38년생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궁금증이 생겼던 것 같다. 총탄이 빗발쳤던 전쟁 이야기부터 80년대 학생운동이 일상이었던 근현대사까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물어보면 할머니는 조그만 목소리로 그때 기억을 돌이키며 대답했다.

 할머니는 6.25 전쟁을 겪은 세대로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시집을 왔다고 했다. 그때는 이른 나이더라도 일본 순사들한테 잡혀가지 않으려면 일찍 결혼시키는 방법뿐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집온 뒤 아들을 낳지 못해 구박받은 일이나 아들이 아니었던 첫째와 둘째가 어릴 적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할머니의 아들 사랑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이젠 요리를 못한다고 엄마가 말하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 일이다. 어쩌다 할머니네에 들르면 술 마시러 나간 삼촌을 기다리다가 늦은 저녁, 혼자 라면을 끓여 드신다면서 엄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속상하다는 듯 얘기했다. 전에는 엄마가 할머니네서 요리를 하고, 삼촌과 할머니, 오빠와 이모가 함께 밥을 먹곤 했는데 사이가 나빠지고선 그마저도 그만 두게 되었다. 마당을 하나 사이에 둔 이웃사촌이면서도 말이다.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의 음식이 짜다고 했다. 김치에도 소금을 원래보다 한 움큼씩 더 쳤고, 음식은 대체로 짠맛이 진해졌다. 거기다 집 안이 지저분해졌다고, 눈이 침침해지니 청소도 깨끗하게 못 하신다며 엄마는 가끔 할머니네 집을 청소했다. 옛날에 할머니네를 가면 주방도, 냉장고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그릇과 냄비에 깨끗한 곳을 찾기가 어렵다.

 요즘은 엄마와 이모가 요리하면 넉넉하게 만들고 할머니 댁에 갖다 드리라며 따로 그릇에 담아 내게 심부름을 부탁한다. 더이상 옛날처럼 요리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한 배려다. 이제 나도 집에서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고,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즐긴다. 요리를 많이 하면 할머니에게 나눠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지난번엔 춘장을 사다가 집에서 짜장면을 해 먹었다. 짜장을 그릇에 담아 할머니네 갖다주었더니 할머니가 그 까만 건 어떻게 먹는 거냐고 물으셨다. 카레처럼 밥이랑 비벼 먹으면 된다고 얘기하는데 할머니가 고맙다며, 할머니는 주는 것도 없는데 늘 받아먹기만 해서 어쩌냐고, 느리고 길게 말을 이으신다. 그럼 나는 씩씩하게 괜찮다고, 다음에 또 맛있는 거 하면 갖다 드리겠다고 답하며 할머니의 느린 말을 끊고 문을 닫는다.


 책 <긴긴밤>에서 어린 펭귄이 할 줄 아는 게 많아질수록 코뿔소 노든은 점차 쇠약해진다. 예전처럼 바람같이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분노로 사람을 위협하지도 못하는 신세다. 책을 읽으면서 쇠약해진 노든의 모습이 작아진 외할머니와 그리고 할머니처럼 입술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의 얼굴 또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해 식당을 그만둔 이모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종종 애매모호한 현재가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 작가나 에디터로서 어떤 성과를 거두고, 돈을 잘 벌고 자리 잡았으면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그런데 책 <긴긴밤>을 읽으면서 그런 미래가 빨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애매모호하더라도 지금 오늘을 감사히 여기자고 생각했다. 어린 펭귄이 어느덧 늠름하게 자라 노든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랬던 것 같다. 나의 노든과 치쿠, 웜보인 할머니와 엄마, 이모가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직은 그들의 품을 떠나 바다를 유영할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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