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개그우먼 조혜련 편
지난 설이었다. 오빠는 여자 친구와 제주도로 떠나 엄마랑 이모 셋이서 단출한 점심을 먹고 커피와 과일을 앞에 두고 앉았다. 도란도란 둘러앉아 며칠 전 남자 친구 엽이와 다녀온 덕유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엄마랑 이모는 얼마 전, TV 프로그램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의 개그우먼 조혜련 편을 봤다고 했다. 연예인들이 나와 개인적이고도 보편적인 고민을 털어놓으면 정신의학과 의사인 오은영 박사님이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명쾌하게 내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연예인들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신선했고, 알 수 없었던 문제적 행동에 대한 전문가의 소견을 듣는 게 흥미로워 나 또한 즐겨보던 프로그램이었다.
엄마와 이모는 개그우먼 조혜련이 엄마와 같은 연배라고 했다. "일본이랑 한국을 오가며 열심히 살았더라고"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딸과의 관계가 문제라고 하면서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했다. 딸이 중학생 시절, 전 남편과 이혼을 했다. 이후 새로운 남편을 맞이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녀들이 이해해주겠지 싶었는지 선행되었어야 할 대화들이 생략됐다. 딸은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얼마 있다가 자퇴를 했다. 딸의 알 수 없는 행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고 했다. 미국 대학교를 다니던 딸이 코로나로 인해 잠시 들어와 한국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갑자기 독립을 선언하더니 집을 나갔다면서 모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와 이모가 공감한 부분은 개그우먼 조혜련의 유년시절이었다. 엄마와 이모의 유년시절엔 남녀차별이 적나라하던 시대에 여러 명의 자매와 한 명의 남자 형제 사이에서 부모의 차별을 당연하게 받았더랬다. 개그우먼 조혜련은 8남매로 일곱 자매 중 다섯째였다. 그 시대는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태어나 열심히 돈을 버는 게 삶의 목표였다. 엄마와 이모도 그랬다. 요즘도 쉬는 날 없이 일하고 설에는 좀 쉬겠다는 아들에게 에어비앤비 손님을 받기만 하면 엄마 이모가 청소고 숯불이고 다 해주겠다고 자처해 설에 좀처럼 쉬지도 못하고, 전을 부치고 손님이 나간 자리를 청소하며 손과 발을 바삐 움직였다.
엄마는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해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맏이인 너는 상업 고등학교를 가라"해서 엄마는 꿈을 접었다고. 그래서 엄마는 자신의 최대 목표가 '애들 대학 보내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뒷바라지해주는 거 그거 하나만 보고 살았다고 했다. 이모는 셋째 인터라 할아버지가 대학에 가겠다면 지원해주겠다고 했는데, 포기하고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났다.
아빠를 먼저 떠나보내고,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 되었던 엄마는 고양시와 성남의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며 바쁘게 일하러 다녔다. 도시에서의 직장 생활을 접고, 자영업을 하기 위해 남양주로 들어왔을 때 집(집이 곧 식당이었기에)에 가면 엄마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좋았지만,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 땀에 찌든 채 엄마와 이모의 식당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 시간을 보낸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간혹 여행을 갈 때면 이모 손에, 친구네 부모님과, 친구와 다녔지 정작 가족인 엄마와 이모가 함께인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부족한 추억은 과거의 엄마에겐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었나 보다. 내 마음과는 반대로 하고 싶다는 공부를 하겠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 엄마는 내가 대학에 진학할 때나 강남으로 영어학원을 다닐 때, 교환학생을 떠나고 싶다고 얘기할 때도 한 번도 내게 돈이 없어 그건 어렵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릴 적엔 주로 태권도나 눈높이, 피아노 학원으로 이루어진 세 가지 사이클을 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랬던 엄마가 개그우먼 조혜련과 그녀의 딸을 보니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우리를 키웠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아휴. 내가 우리 애들을 잘 못 키웠구나 했어. 우리도 자주 놀러 다니고,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걸..."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벽을 쳐다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나는 엄마를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같이 이야기하던 이모도 곁에서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는데, 굳센 엄마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 "아이고, 우리 딸 왜 운대" 하면서 괜스레 말을 건넸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와 가족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내 안에 쌓인 복잡했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왜 이렇게 힘들까. 엄마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다가도, 가까이 살면 왜 이렇게 미워할 수밖에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와 가족에 대한 엉킨 실타래 같은 감정을 오래 살펴보았다. 글을 계속 쓰면서 깨달은 건 엄마는 내 유년시절 동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와 오빠를 키워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무척이나 외로웠다는 것이었다.
유년시절 동안 날 선 고슴도치처럼 까칠했던 오빠와 바쁜 맞벌이 부모처럼 부모 역할을 해냈던 엄마와 이모, 그 곁에 나는 외로웠다는 걸 글을 쓰면서 알아차렸을 때 참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과거에 가슴에 난 생채기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메말랐던 감정에 홍수가 나듯 눈물을 쏟아냈다. 어릴 적 나는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없던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 안에 난 상처를 대충 덮어두었기에 눈물이 나올 겨를이 없던 거였다.
그런데 엄마의 그 후회의 말이 어쩐지 오랫동안 외로웠던 내 안에 자리한 어린 보영이를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 이후 시간이 날 때 혼자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조혜련 편을 정주행 했다. 두 모녀의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특히, 엄마 조혜련이 딸 윤아에게 사과하는 장면에서는 엄마가 내게 했던 몇 마디 말과 겹치면서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말로 들려 눈물을 후드득 떨궜다. 엄마가 어린 보영이와 오빠를 데리고 많이 놀러 다니고 했어야 했는데, 그땐 뭐가 바쁘다고 그렇게 일만 했는지 몰라. 많이 외로웠겠구나.
가끔 극기원에 가서 시험을 보고 검은 띠를 따거나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상을 타오고 나면 엄마는 할머니와 삼촌 앞에서 자랑을 했다. 한 번씩 내게 시범을 보여보라며 자랑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왜 그렇게 대견해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꼬맹이였던 나도 나이가 들고, 엄마를 이해하면서는 엄마를 원망하기보다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엄마가 자라면서 느꼈을 결핍을 채워주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그럴수록 어떤 다른 부분은 자연적으로 결핍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정문정 작가님이 어릴 때 부족했던 문화적 자본이 부끄러워, 자신의 어린 자녀에겐 그 문화적 자본이 부족하지 않게 키울 거라고. 그렇지만 그건 필수적으로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느 다른 부분의 결핍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글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엄마도 내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Cover Photo by Laurent Peignault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