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판악 탐방로에서 8시 출발, 5시 반 하산
한라산에 가보기로 한 건 11월 어느 날부터였다. 함께 등산하며 친해진 서연이가 올해 버킷리스트였다고 했던가. 남자 친구 엽이도 가고 싶다고 하니 나도 따라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12월의 넷째 주 월요일과 화요일, 연차를 쓰기로 결정하자마자 추진력 좋은 엽이는 비행기표와 렌터카를 예약하고, 서연이는 함께 묵을 숙소를 알아보더니 어느새 한라산 출입 예약을 마쳤다.
한겨울에 눈꽃 산행이라니, 그것도 연말을 앞두고 떠나는 산행은 꽤나 로맨틱했다. 한라산만 다녀오는 여행 일정인데도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와 크리스마스를 앞두었다는 설렘, 따뜻한 제주도로 떠날 생각만 해도 여행 전부터 이미 여행을 시작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울 산행이다 보니 챙겨야 할 준비물도 꽤나 많았다. 아래는 내가 전날 준비한 준비물 목록이다.
준비물
무릎 보호대 -> 엽이 1개 대여
스틱
장갑(여분 장갑 1개 더)
등산화
여분 양말 / 이너/바지/경량 패딩 /잠옷/스킨로션/렌즈액/치약
렌턴 / 여분 헤드 렌턴
핫팩 / 여분 핫팩
소분 팩(간식용)
초콜릿/귤
보온병 / 따뜻한 물 -> 엽이
경량 오리털 이불 ->엽이
파스
현금
가서 살 것
김밥 / 오메기떡
모든 준비물을 완벽하게 챙기고 집을 나섰을 때 방풍 바지를 안 챙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떠나는 날은 영상의 기온이었고, 기모 레깅스만 입어도 괜찮을 듯싶어 쓸모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챙기지 않았는데, 조금 후회했다. 제주도의 바람은 육지와는 달랐으니...
제주에 도착해서 전기차를 빌리고, 저녁을 신의 한모에서 해결한 뒤 동문시장에 들렀다. 산행 중 먹을 김밥과 오메기떡, 당일 저녁에 먹을 회 한 접시를 사기 위해서였다. 고등어&갈치&광어 세트를 15,000원에 구매한 후 오메기떡을 인당 3개씩 9,000원에 다양한 맛으로 구매했다. 나중에 산에서 먹은 이 오메기 떡이 꿀맛이었는데 낱개로 포장되어 있고, 이동 중에도 먹기 편리해 이번 산행에서 새롭게 발견한 간식거리 중 하나였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회로 간단한 야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여섯 시 반에는 일어나 일곱 시에는 출발하는 일정이었으니까. 아침은 엽이가 가져온 우거지 해장국과 햇반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성판악 탐방로에 도착했을 때 7시 반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미 주차장은 만차였다. 일찍 가지 않으면 주차할 곳이 없다는 건 블로그를 통해 이미 전해 들은 얘기였지만, 주말도 아닌 월요일이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주차장에서는 주차할 곳이 부족하니, 제주 국제대학교 주차장으로 돌아가라는 안내용 방송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진 우리는 급하게 차를 돌렸고, 우리가 입장 예약한 시간이 오전 6:00~8:00 였기 때문에 입장 시간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티켓이 취소되는 거 아닌가 걱정이었다. 급히 차를 대놓고, 택시를 탔을 때 남은 시간은 10분. 기사님은 8시까지 딱 도착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며 속도를 냈다. 꼬불꼬불한 한라산 길을 자주 다닌 듯한 기사님은 빠르게 밟더니 7시 59분 어느새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탐방로 시작점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아이젠과 스틱을 꺼내며 출발을 준비했다. 주변의 입장객들도 아이젠과 스패츠를 신느라 분주해 보였다. 나는 양 무릎 모두 무릎 보호대를 차고, 새로 산 넥워머를 두르고, 스틱과 아이젠까지 찬 뒤 준비를 마쳤다.
입구에 계신 탐방로 직원 분은 마이크를 차고 아이젠이 없으면 올라가시면 안 된다고, 한라산 등산객 중 부상 혹은 목숨을 잃은 통계치를 이야기하며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 제대로 된 장비와 복장이 없다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겁이 났다. 나이 든 등산객들과 우리처럼 젊은 등산객들이 보였고, 아무 등산 장비 준비 없이 뒷산에 오를 정도의 복장으로 온 커플은 아쉽지만 다음에 오자며 돌아가고 있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등산로 초입부터 제법 눈에 쌓여 있었다. 영상의 날씨라 출발 전 서울에도, 제주에도 눈이 내렸음에도 제주 곳곳은 눈이 녹은 지 오래였기에 한라산 위엔 눈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더랬다. 오랜만에 신는 아이젠과 함께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등산을 시작했다. 육지와는 다른 풍경에, 소복이 쌓인 눈에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시계는 어느새 월요일 아침, 아홉 시를 알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사무실에 앉아 있을 시간에 이렇게 멀리 떠나와 산속에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다 보니 빨리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서울에서 근교로 떠나던 일상적인 산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식물들이 곳곳에 자리했고, 그 위에 눈이 덮이니 이국적인 풍경처럼 느껴졌다. 오르다 보면 여기서 진달래 대피소까지 몇 킬로 남았는지 알려주는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우리 목표 시간은 12시였다. 정상 부근은 너무 춥다고 했으니 진달래 대피소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정상에 오를 계획이었다.
해발 1,000미터 부근에서는 상고대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는데, 진달래 대피소에 가까워질수록 나뭇가지 위에 서리가 두껍게 얼어붙은 상고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쯤부터 먼 곳에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르면 오를수록 새로운 풍광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순간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바빴다. 매번 '이런 순간은 꼭 찍어야 해!' 하는 생각을 한 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리곤 했다. 완벽한 순간을 적확하게 담지는 못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그 순간도 예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솔밭 대피소를 지나 진달래 대피소에 들어섰을 때 맑게 갠 하늘과 옅은 농도로 그린 듯한 수채화 같은 구름이 우릴 반겼다. 사람들은 대피소 바깥 곳곳에 자리 잡아 가져온 라면을 먹거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한편에 자리를 펴고 앉아 가져온 김밥을 꺼내 먹었다. 올라오느라 꽤나 출출했는지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었다. 귤이나 초콜렛, 꿀호떡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산행을 시작할 채비를 마쳤다.
진달래 대피소부터는 이전까지와 다르게 사람이 꽤나 많아졌다. 길이 기존보다 좁아진 탓도 있을 테지만, 정상을 찍고 다시 진달래 대피소에 와야 하는 시간이 오후 3시로 제한되어 있어서도 있는 듯했다. 땀이 날 때는 모자를 벗고, 경량 패딩을 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살짝 추워지면 경량 패딩을 입고, 넥워머를 코까지 올려 쓰면서 체온 조절에
신경 썼다.
한라산 정상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올라온 길을 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엔 구름이 잔잔히 떠 있었고, 저 멀리 제주 바다부터 시작해 눈 녹은 평지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면 눈꽃 핀 정상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이때부터는 등산객들이 한 줄로 서서 차례대로 오르고 있었는데, 세찬 바람이 점차 몸을 세게 흔들어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점점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한라산 등반이 아닌,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백록담 근처까지 올랐을 때 길게 늘어선 정상 포토 줄이 눈에 띄었다. 그때 체감온도는 영하 15도쯤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세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긴 줄을 늘어서 있었다. 산행 전 오늘은 정상에서 꼭 사진을 찍자고 했던 약속했던 건 무색하게도, 우리는 너무 추우니 빠르게 사진을 찍고 내려가자고 합의했다. 정상 부근 바람은 자연재해처럼 느껴질 만큼 심하게 불었다. 백록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아무나 이 귀한 걸 보여줄 수 없다는 듯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가까이 가는 건 포기하고, 멀찍이 떨어져 사진을 남겼다. 그 후 빠르게 하산하기 시작하는데, 너무 바람이 세차게 불다 보니 백팩 사이드포켓에 묶어둔 등산용 돗자리가 날아가기도 하고,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해 속력을 내 하산을 이어갔다. 어느 정도 내려왔다 싶을 때 각자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앉아 동행한 서연이가 가져온 양갱과 따뜻한 물을 마시며 몸을 녹였다. 친구 서연이와 엽이가 보온병을 가져오느라 고생했지만, 하산 중 마시는 따뜻한 물은 몸을 데우기에 충분했다.
원래 하산하기만 하면 무릎에 통증이 생겼었는데, 이날은 출발부터 무릎 보호대를 차고 등산을 시작해서 그런지 무릎에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진달래 밭 대피소까지는 빠르게 내려갔다. 진달래밭 대피소 외에는 화장실이 없어 대피소에 도착해 급히 화장실을 가기 위한 것도 있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다시 내려왔을 때는 3시쯤, 다시 주린 배를 채웠다. 겨울에는 성판악 탐방로까지 5시까지 도착하려면 3시 반에는 적어도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출발해야 한고 방송이 울렸고, 우리는 다시 하산 채비를 시작했다.
이후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해가 져서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오를 때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에 신이나 발걸음이 빨라졌다면, 내려갈 때는 풍경도 그저 그런데다 다리가 무겁고, 미끄러워질까 조심하느라 속력이 안나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일수록 발목을 다치기 쉽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한라산은 계단으로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그런지 부상 없이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같이 동행한 친구는 준비해온 무릎보호대가 잘 맞지 않아서 그런지 하산 때 고생을 했다.
다시 시작점인 성판악 탐방로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등산 내내 썼던 아이젠과 스틱을 정리하고 주차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281번 버스를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9시간 산행이 고단했던 탓이었다. 우리는 등산 중 이 기세라면 코로나가 끝나면 해외 산행도 갈 수 있겠다면서 의기를 투합했다. 막연히 한라산 등반은 해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할만했고, 길이 잘 닦여 있어 그런지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지난여름 설악산 공룡 능선 등반보다는 한라산이 내게는 조금 더 할만했는데, 컨디션 조절을 잘하고 등반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코스 자체도 훨씬 편안하기도 했고.
그날 저녁은 기운이 없어 근처 고깃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와 11시가 되기 전에 잠이 들어버렸다. 11시에 일어나 루미큐브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모두들 에너지가 똑 떨어진 탓에 아무도 그때 일어나지 못했다. 눈을 뜨니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제주도에서 다시 타야 하는 비행기는 오전 10시 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지만, 한라산을 제대로 즐기고 갔다는 뿌듯함만은 안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계산해보니 총경비로 1인당 15만 원 정도밖에 쓰지 않았다. 적은 비용으로 최대치의 행복을 안고 돌아온 2박 3일 한라산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