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카를 오게 라스무센, 풍월당, 2023)
형~ 딱 절반을 읽었네, 이제야. 브뤼노 몽생종 것으로, 리흐테르의 대강을 아니까, 순서대로 읽지 않고 맘에 드는 꼭지부터 읽었어. 카를 오게 라스무센의 글이 꽤 좋아. 리흐테르에 대해 다른 차원에서, 또 다른 면을, 특히 형이 내게 리흐테르 연주 목록(리스트)를 건넸을 때의 어렴풋했던 형의 마음•심정을 이 책 덕에 조금 더 알겠어. 리흐테르와 리흐테르의 연주를 향한 형의 애정도.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이미지와 환영’이라는 꼭지가 특히 좋네. 읽다가 몇 번이고 돌아와 군데군데 다시 읽게 만드는 글, 리흐테르라는 인물에 대한 전체적인 스케치, 작가가 생각하는 큰 그림을 그려놓고 시작하는 게 맘에 들었어. 지도같은 글, 글렌 굴드와 비교하면서 쓴 것도 특히 그렇고. 무엇보다 번역도 그만이네. 멋진 책이 <경계의 음악>과 <음악 없는 말>, <슈베르 평전>도 옮긴 좋은 번역가를 만났어.
리흐테르의 늘어지는 연주를 들은, 까탈스런 굴드의 말, “그 후로도 리흐테르의 음반을 들을 때마다 여러 번 그랬듯이 우리 시대 음악계가 낳은 가장 강력한 이야기꾼이 바로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나도 가끔 리흐테르는, 본인은 극구 부인(“나는 악보에 적힌 그대로 연주할 뿐인데...”)할테지만, 넌지시 말을 건넨다고 느낀 적이 있거든. 굴드가 남긴 말에 피식 웃었네. 이 책이 브뤼노 몽생종의 것보다 더 좋아.
형, 나는 여전히 연주자와 연주, 사람과 그의 예술 세계를 떼놓지 못하겠어. 카라얀의 쨍한 신비로움을 좋아했던, 여전히 가끔 듣지만 예전 같지 않은 이유와 지루했던 푸르트벵글러의 낡고 늙은 연주에서 새로움을 느끼는 이율배반,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좋은 연주는 더 나은 ’사람‘되길 몸부림치는 이가 만든다고 생각해.
16꼭지 중에서 맨처음과 ‘만년’의 리흐테르를 먼저 읽었어. 그리고 맨끝, ‘후주’와 ‘음악적 유산’을 읽고, ‘가슴을 찢는 슬픔’과 ‘보이지 않는 장벽 너머의 인간’을 읽었어. 그 다음에 ‘오데서 : 빛과 어둠’과 ‘음악, 권력, 그리고 음악의 정치학’까지 읽었네. 곧 ‘방랑자’를 읽지 싶어. 소제목이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리흐테르에 대한 작가의 초상 곧 해석이 좋아.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제목들, 게다가 문득 만난 만년의 리흐테르 푸념은 남일 같지 않네.
“내 흥미를 자극하는 건 이제 없다. 아침 저녁으로 이를 꼼꼼히 닦고 매일 프루스트와 토마스 만을 조금씩 읽을지어다.”
형, 이 책을 마저 읽고 나면, 그의 연주를 좀 더 이해하게 될까, 리흐테르가 다르게 들릴까, 아니면 더 모르겠고 헤매게 될까. 난 한 사람이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모순적인 존재인지를 깊이 탐구하고 염탐하면서도,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해 해석이 엇갈리고 결론 내리지 못하는 영화•소설•철학•역사 이야기에 끌리는 거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순간엔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딜레마까지도 말이야. 가끔 리흐테르의 어떤 연주에서, 연주에 담긴 그런 엇비슷한 리흐테르의 끙끙거림을 느껴. 마치 웅얼거림 혹은 신음같은 그 무엇.
“리흐테르는 둘로 쪼개진 모순덩어리였다.”
형, 횡설수설 두서없는 이 글, 정성일의 말, 곧 그의 책 제목을 빌어, 편지를 빙자한 쪽글과 형의 책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얼른 맺어야겠어, “언젠가 세상은 음악이 될 것이다.“라고. 무더운 여름 몸 챙기고 선선한 가을 혹은 올해가 가기 전, 아니면 해를 넘겨서라도 꼭 봅시다. 고마워, 형! 이 책 참 좋다.
”그의 연주를 들으러 갔습니다. 문득 내 눈이 촉촉해지더니 양쪽 뺨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누군가 내 심장을 움켜쥔 것만 같았어요.“(아르투르 루빈스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