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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Aug 26. 2023

<비밀의 언덕>, 작가는 태어나는가?

<비밀의 언덕>(이지은, 2022)


명은이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고르고 골라 선물을 할만큼, 고른 선물 포장지에 붙일 리본을 골랐다가 다시 무를만큼, 선생님을 좋아한다. 명은이는 선생님이 엄마와 달라서 좋다. 선생인데도 지각을 밥 먹듯 하지만 엄마와 다른 선생님을 100배나 더 좋아한다. 명은이는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 엄마가 주지 않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명은이는 반장이 되고 싶다. 반장은 선생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확실한 길이다. 반장 선거 연설도 결국 글이다.


작가는, 특히 소설가는, 글 짓는 사람이다.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 일종의 비밀이자 거짓말, 은밀하고 감쪽같으며 솔깃한 이야기를 쉴새없이 평생 짓는 이들인데, 아무나 못할 짓이다. 명은이에게 글 쓰기는 생존본능이다. 글 쓰느라 연필에 눌려 배긴 굳은 살 탓에 손가락이 미워져도, 명은이는 글을 지어야 한다. 숙제도•편지도 글이고 반장이 되려고 발표한 공약, 비밀 우체통(학급 건의함)에 다른 필체로 수십장의 글을 써 채우는 것도 그렇다. 명은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글쓰기다.



명은이에게, 살기 바쁜 엄마가 주지 않는 응원과 격려없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글만한 무기가 없다. 명은이는 혼자서 다 척척 해내야 한다. 그래서 명은이의 글은 위악을 부리긴해도 교과서적이고 참고서적인 사실(팩트)과 발로 뛰고 공(시간)들인 취재 곧 성실함 위에 뿌리를 내린다. 명은이의 글쓰기는 일종의 도피다. 명은이는 그래서 지어낸다. 친구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그럴듯 해야 하고 그럴듯 하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참고 서적과 취재, 사진은 강력한 알리바이이자 증거 곧 글짓기의 재료다.


”가족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에요“(명은이 대사)



엄마가 싫어도, 아빠가 한심하고 오빠가 미워도, 명은이는 지킬 가족이 있다. 하지만 전학 온 혜진이는 가족이 없다. 지킬게 없으니 잃을 게 없다. 아니 자신만 지키면 된다. 혜진이의 솔직함은, 아빠•남자 어른이 개새끼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과정과 엄마따라 전학을 밥 먹듯 다니고, 또래에게 따돌림 당하며 갈고 닦은 무기다. 혜진이를 둘러싼 세계는 이미 박살났다. 무미건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읽는 혜진이의 글은 솔직하고 적나라하다. 명은이는 혜진이의 솔직함이 부럽다. 거짓말은 허약하니까.


”아빠는 없구요, 엄마는...“, ”짜증나, 돌아가면서 은근히...“(혜진이 대사)



혜진이의 솔직한 글에 대한 선생•어른의 반응은 동정이다. 민망한•부끄러운•가슴 아픈 어른들은 혜진이의 글에 (보)상을 준다. 혜진이는 자기 패를 다 까고 솔직해서 얻은 동정(상)이 유일한 보호막이다. 혜진이의 솔직한 글은 힘이 무척 세다.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 명은이는 휘두르지 못할, 위악은 부릴지언정 지켜야 할 게 있기에 깔 수 없는 패, 그래서 명은이는 거짓말을 짓는다. 차마 듣고 보기 어려운 사람•폭력 가득한 세상을 겪은 혜진이가 쓴 이야기는 위악 부리는 명은이에게 위협적일뿐 가닿지 않는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명은이와 혜진이 중에 누가 창작자•작가가 될 수 있을까. 두 사람 다 저 마다의 세계를 구축한 좋은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땐가 혜진이에게 글쓰기는 자기를 사랑하고 다독이고 치유하는 과정이 되지 싶다. 자기를 아끼는 글쓰기, 자기를 보둠는 글쓰기, 자기로부터 거리두고 구원하는 글쓰기, 그래서 세상을 다시 구원하는 글쓰기, 곧 사랑의 글쓰기, 혜진이가 멋진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명은이는 솔직함과 거짓말 사이를 능수능란하고 그럴듯하게 그린 세계를, 사람들이 궁금해할 비밀로 가득한 비빌 언덕을 가진, 성실한 소설가•이야기꾼이 되지 싶다. 둘 다 부럽다.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하염없이 걷고 싶다. 어떤 영화는 나도 한 뼘, 아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같이 자란 느낌이 든다. 어떤 영화는 보자마자 다시•함께 보고 싶다. 어떤 영화는 그 영화를 본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고 싶게 만든다. <비밀의 언덕>은 감독이 어린 시절 복에 겨웠던 지난 위악을 반성하기도•돌아보기도 하는 영화다. 어린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노스탤지어)와 낭만은 위험하지만, 이만하다면•이만은해야 팍팍한 세상 살 맛도 나지. 명은이는 커서 벌써 좋은 작가•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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