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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Sep 17. 2023

오리아나 팔라치,라는 기자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행성B, 2018)


인생 주기(Life Cycle)를 들먹이는 곳은 죄다 금융•보험 쪽이다. ‘인생 주기에 맞는 자산 관리’ 등등등, 물론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30대 중반부터 중년은, 각자 책임지고 닥친 일을 해치우고 먹고 살 궁리를 하느라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갖기도 어렵다.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와 안전망,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줘야 하는 데 정치는 오리무중이다. 어디다 말하기도 어렵고 뼈 아픈데다 슬픈 사건은 죄다 어느날 갑자기 닥친다. 그러다 부서진다. 


돌아볼 뿐 아니라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부, 특히 “나 자신과의 인터뷰”도 필요한데, 인생 주기(연애•취업•결혼•출산•승진•살림•이직•육아•교육•입시•부모 돌봄 등)에 따라 더 많아지는 접면과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를 그저 수습하기도 바쁘고 벅차다. 한국 사회에서 30대 중반부터 중년은 교육의 대상에서 없는 존재다.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시기에 일터 혹은 사업이라는 경쟁에 내몰려 죽을똥 살똥 달려야 한다. 대체로 영혼을 갈아 넣거나 죽기 살기,라는 살벌한 선택지만 주어진다. 


“나는 세상을 피상적으로 해석했고, 환멸로 가득했다. 젊은이의 시각, 다시 말해 깊이가 없는 해석이었다. 젊은이들은 관대하지 못하므로 경솔하기 마련이다.(•••) 청년들은 언제나 세상이 자기와 함께 시작한다고 믿는다.”(57쪽)


오리아나 팔라치

성찰하지 않은 경험은 자주 선을 넘고 누군가에게 폭력적이기 십상이다. 이제부터는 나로부터 곁에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를 가끔•다시 들쳐 읽을 때마다 놀란다. 특히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는 놀랍다. 이게 한 두번 그저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휘갈겨 쓴 게 아니다. 팔라치의 이탈리아 책들이 정성껏 차곡차곡 번역되면 좋겠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60쪽 남짓 팔라치의 어린 시절 글을 읽으면, 인생의 시점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둘러 싼 이들(조부모•부모•친척 등)과 자신이 살았던 곳이 겪었던 역사적 사건과 시대에 대한 공감각적 사유뿐 아니라, 반복해서 복기•정리하고, 필요하면 당사자들에게 묻고 대화하고 다시 떠올려야, 이렇게 쉽고 천진난만하지만, 확신에 가득 차서 말하거나 쓸 수 있지 싶다. 그저 추측이다.  


“팔라치가 기자로서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글을 쓴 것은 자신과 인생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위의 책 옮긴이 말 중에서)


인생 어느 시점에 어린 시절, 특히 10대에 겪은 사건•사고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고단한 현실 세계에서 대개 아이들은 주변 어른들을 상대할 준비가 되었을리 만무하고 대개는 속절없이 당하기만 한다. 좋은 기억(추억)보다 주로 가정과 학교, 혹은 종교 집단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는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무의식 깊숙히 자리 잡게 마련인데, 이 경험이 현재 관계를 맺는 방식에 꽤나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 임상 심리나 정신 의학 차원에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불가피하다면 나 자신을 희생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 누구도 절대 죽이지 않기 위해서.”(40쪽)

“인식의 봄.(•••) 그 봄을 초콜릿처럼 맛 보았다.”(44쪽)



프로이트•융•라캉을 꼭 공부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신뢰할 만한 가까운 관계부터 시작해 동심원을 조금씩 넓혀 다양한 삶의 궤적을 가진 이들과 나누는 속 깊은 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물질적 풍요는 확보하고 사회적으로도 자리는 잡는데 그저 만날 사람, 속 깊은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거나 그럴 사람이 없다면 잠깐 멈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함께 좋은 글을 골라 읽고 찬찬히 쓰고 규칙적으로 만나서, 지도(코칭)를 따라, 서로 수다(Su:DA)떨기는, 그래서 좋은 시작일 수 있다.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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