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며칠 전 핸드폰의 배경화면을 ‘아메바’로 바꾸었다.
실물은 징그러워서 그나마 귀엽게 캐릭터화한 것으로다가.. 문제시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단순한 행동으로 넘어가면 될 일에 의미부여를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하는 것이 귀찮았다. 그냥 아메바처럼 단순하게 살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마주한 이 책 <라캉의 주체>는 이런 나의 결정을 뒤흔들었다. 주체적으로 살라고. 그러려면 모든 걸 의심하고 비판해야한다고 말이다. 내가 믿고 말하는 것은 의식적 행위이므로 진짜가 아니고, 그렇다고해서 나의 무의식을 변증화해 밝혀난다고 해도, 그 무의식조차도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복잡한 논증만큼이나 주체적으로 산다는 건 피로를 동반한다. 특히나 욕망으로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주체가 되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을 주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라캉은 이를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위치설정’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으로 존재하는 한에서 우리는 소외되므로 환상을 재구성하고 횡단하여 이러한 타자성을 스스로 떠맡는 주체화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라캉이 이 논증을 했을 때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욕망으로 넘쳐나며, 나아가 서로의 욕망을 전시(display)하여 타인과 나의 삶을 비교하기 너무나 쉬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위치설정을 해야 할 타인의 욕망 역시 한층 더 복잡하다.
그러다보니 소외는 계속 일어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한참 쫓기는 하는데, 그러다보면 내가 욕망한 것이 아닌 것임을 매순간 느낀다. 내가 생각한 일이란, 사랑이란, 삶이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분리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라캉은 타인과의 관계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타자인 고용주의 잉여이익을 위해 노동자인 나는 노동과정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현대사회는 고용주의 잉여이익은 점점 더 쌓여만 가는데, 노동자인 나에게 오는 이익은 점점 더 줄어드는 세상이다. 우리 사회의 욕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 내가 욕망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작다. 그래서 소확행이란 행복론이 유행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행복. 타자들의 욕망을 따라가기에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도 버거워 분리의 단계까지는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으니 그냥 내 눈앞에 확실한 것이라도 잡자는 것이다.
물론 <라캉의 주체>는 한 개인의 단위 안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석학이기에 개인의 비주체화에 대한 변명을 모두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돌릴 순 없다. 하지만 분명 그 개인이 이미 ‘갖춰진 사회’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체라는 개념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욕망은 원초적인 발견이 아니라 이미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의 ‘재’발견이라는 라캉의 말 역시도 우리의 욕망을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만약 내가 2018년 아닌, 한국이 아닌, 한국어를 쓰지 않는, 현재 부모가 아닌, 지금 내 주위의 친구와 동료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나는 분명 다른 욕망을 가진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원인과 결과의 틈새를 메워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 달리,
원인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여 법칙을 파괴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이 설명이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라캉의 이러한 멋진 견해를 실천하기에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법칙을 파괴하기 보단,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그래야 적당한 결혼 상대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견고한 법칙을 되새김질 한다. 그러다 그 법칙을 깨고 자신의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엄청난 패배감과 희열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제서야 내가 욕망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래서 소확행은 불행한 현실의 반증인 동시에 희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복한 것을 욕망하겠다는 것. 아, 아메바처럼 단순하게 내가 행복한 것을 찾아 욕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