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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Apr 26. 2018

나쁜 페미니스트

나오미 울프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알고있다. 쿨톤/웜톤을 따져가며 화장품을 사고, 술 마실때 안주를 덜 먹으려고 하는 것은 남이 보는 나를 의식해서라는 걸. 회사에서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띄워주는 것을 굳이 거부하지 않고, 이성인 다른 팀 선/후배에게 뭔가를 부탁해야 할 때 은근히 목소리 톤이 높아지는 것이 나의 위치를 이용하는 것이란 것도.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미투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성으로서 겪었던 부당함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성을 도구화하는 장면의 불편함을. 그래서 주위 남자인 친구들을 이해시키려 설득하고, SNS에 그런 불편함에 대한 글을 올려 다른 사람들도 문제 의식을 갖기를 바란다.


생각의 지점들은 모순으로 맞물려 있고, 머리와 행동은 불일치하며, 마음 속 깊이 분개했다가도 피곤해져서 입을 닫아버린다. 그게 지금의 내 모습이다. 내 문제의식을 눈치 챈 한 친구가, 함께 여성민우회에 가입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거부했다. 지금으로도 갑갑하고 벅찬데, 지금도 모순덩어리인 내가 위선적으로 느껴지는데, 지금보다 더 보이는 것이 많아지고 아는 것이 많아지면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두렵기도 했다. 나이 서른 넘어서 연애와 결혼의 압박도 조여오는데, 여기에 페미니스트라는 색깔까지 지워지면 어쩌나.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 만큼 강단있는 성격도 못되는데 말이다.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는 이 모든 것의 부당함을 말한다.


특히 나오미 울프는 이것을 '은밀한 처벌'이라고 일컫는다. 눈에 보이는 불평등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경제, 법, 종교, 성, 교육, 문화까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 어느 분야에서는 여성이 특출나게 두드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이젠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을 이용해 여성의 의식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불평등은 해소되었을지 몰라도, 경제, 법, 종교, 성, 교육, 문화까지 모든 분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불평등은 지속된다.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외모와 나이가 주는 권력을 체화하며 살아왔으니까. 어느 분야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일보다, 어느 자리에서건 외모와 나이로 평가받는 일들이 더 많았으니까. 은밀한 처벌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것이다.  

세 번째 물결은 이런 의식의 변화를 일컫는다. 하지만 의식의 변화라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주 작은 습관, 선입견 하나를 바꾸는 것도 엄청난 노력이 드는데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여성이 갑자기 이걸 인식하고, 나아가 행동하고, 더 나아가 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페미니즘 책 <나쁜 페미니스트>가 생각났다. 페미니스트인 저자는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을 상품화한 팝송을 즐겨듣고 때론 페미니즘에 반하는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단 거다.


  지치지 말아야겠다. 조금 더 낙관해야겠다.


고맙게도 내가 이렇게 모순된 채로 겁이 나서 한발짝 물러나있을 때도 곁에는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회사의 여성 동료들과 자기가 잘 모르니 여성의 입장을 말해달라고 하는 남자인 친구들이 있다. 불과 몇년 전만해도 몰카의 '피해자'였던 가수는 울면서 자신이 잘못했다고하며 자숙했다. 시간이 흘러 이젠 드라마 속에서 여성을 벽으로 밀치고 억지로 키스하는 장면에 문제제기를 하는 세상이 됐다. 미투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자기가 이 사실을 말함으로써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고. 나 역시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란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동등하게 자신을,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조심스럽게, 나쁜 페미니스트라도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지난 독서모임 책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를 읽고 썼던 독후감이다. 최근 또 다른 책 소설 <표백>을 읽었는데, 현대사회를 “민주주의나 경제불평등 같은 중요한 과업은 모두 달성(질적인 의미보다는, 이미 한 번의 혁명을 거쳤다는 뜻)했고, 남은 것은 젠더이슈나 환경이슈같은 혁명이 아닌 그보다는 작은 문제들"이라고 서술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젠더이슈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다른 성 사이의 민주주의와 경제적불평등 문제이다. 따라서 젠더이슈는 현대 사회에서 설령 우리가 더 말하기 피곤할지언정 지속해서 논의해나가야 할 이슈이며, 실천해나가야 할 혁명이다. 특히 의식의 변화를 수반해야함으로 그 어떤 혁명보다도 단숨에 이루기 어려운, 지속되어야 할 혁명이다.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와 함께 읽으면 좋을 오늘자 기사가 있어 공유한다.


* 덧 : <표백>을 쓴 장강명 작가를 좋아하며, <표백>의 이야기에도 동의한다. 나 역시 표백세대이므로. 저 문장 역시 거시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고있다. 다만 여성 문제를 다른 사회 문제보다 덜 중요하고 하등하게 여기는 인식에 대한 반박을 하기 위해 인용했다.




경향신문, 2018.04.26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4)성추행 고발서 남과 여 일상화된 모순 흔드는 바람으로


한국 사회에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고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도 제법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성평등 문제는 늘 부차적이거나 당장 시급하지 않은 문제로 여겨져왔다. 민주주의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인권과 평등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성평등 혹은 여성과 관련된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면 되는 일’로 치부됐다. 2002년 개혁당 성폭력 사건 때, 지금은 전업작가 겸 방송인이 된 한 정치인은 “해일이 일어났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가 성차별 문제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정치적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제 몫의 권리를 동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에게는 ‘민주화 혁명’을 넘어선 또 다른 ‘일상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근래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미투 운동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성폭력과 그 밑에 깔린 성차별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사건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집단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는 “계급갈등과 사회양극화 같은 문제는 ‘흙수저론’ 등의 담론으로 대중적 공감대를 얻었고, 양극화를 극복해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사회적 합의도 형성됐다”며 “하지만 저출산이나 여성 노동력 미활용, 성별 임금격차 같은 구체적인 현상으로 이미 성차별 구조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매우 낮다”고 말한다.


(중략)


가부장적인 성차별 구조의 문제는 미투 운동을 통해 폭발력 있는 이슈가 됐다. 유명 문인과 연극인, 유력 정치인, 인기 절정을 달리던 방송인들이 피해자의 고백에 하루아침에 사회적 생명력을 잃었다. 피해자들이 고발하는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단과 연극계의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여성의 이해관계를 쥐고 있는 남성 권력자’임을 명시했다. 남성 교수가 여학생들을, 남성 정치인이 여성 비서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 등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힘 가진 남성과 상대적 약자인 여성 사이의 문제라는 유형이 그대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의 고발과 증언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괴물 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에게 권력과 지위가 쏠린 성차별적 구조에 있음을 보여줬다. 이달 초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참가자들은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미투 운동이 성차별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서 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성 권력에 도전하고 위계구조를 뒤집으려 한다는 점에서 미투는 ‘혁명’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52203005&code=210100#csidxe84164891cdd23baafbb1faa165d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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