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이 책이 왜 이렇게 좋았을까. 아무래도 이런 글이 너무 탐났던 것 같다. 영화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보고, 그것을 꼭꼭 소화해서 간결하면서도 자신만의 생각으로 풀어낸 글. 나는 책을 읽고 간간히 이 곳에 리뷰를 쓰고 있지만 아직 책에 좋았던 구절 옮기기에 그치는 것 같다. 조금 더 내 시선으로 바라보고 깊게 생각해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자는 영화를 이렇게 본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혼자 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메모하느라 대개는 두 번 본다. ‘혼자서 본 영화’는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나는 책을 이렇게 읽는다. 우선 책을 읽는다.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을 접어두거나 포스트잇을 붙여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글파일로 옮겨 적으며 다시 읽는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 그 파일을 다시 보면서 내 생각을 정리한다. 요즘은 독서모임을 통해 같은 책을 함께 읽기도 하는데 읽고나서 책에 대해 이야기할때면 같은 책이라도 각자 느낀 지점이나 해석이 달라서 새롭게 읽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저자는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책을 읽는다.
문학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게 하고, 비문학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생각해보게끔 한다. 책을 읽을수록 타인과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범위가 넓어진다. 이는 곧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과 같다.
저자는 여성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주로 여성의 시각에서 영화를 바라본다. 요즘에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무슨 여전사처럼 받아들이지만, 페미니즘 자체는 여성은 (과거부터) 약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 표현 방식이 일부 공격적인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특히나 영화에서는 여성을 그리는 방식이 제한적이었다. 순결한 여자이거나 팜므파탈이거나. 주인공을 돕는 역할이거나, 주인공의 성취를 방해하거나. 여성 자체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남성의 행동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형태로 존재했다.
우선 아무래도 영화감독이 남성이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또한 문화콘텐츠 자체는 그 전 세대 콘텐츠의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영화 자체가 남성의 시각으로 쌓아온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 방식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때론 여성인 감독조차도 여성의 시선이 아닌 이미 체화된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그런 예를 소개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여성이 여성의 몸을 더 섹슈얼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포르노를 포함한 섹슈얼한 영상들은 기본적으로 남성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그러다보니 여성은 벗은 남성을 볼 때보다 (오히려 무섭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벗은 여성을 보고 섹슈얼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약자로서의 여성을 공부해왔기에 기본적으로 약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이 작가만의 시선이고 해석이다. 철저한 미장센 분석이나 영화적 해박한 지식이 없더라도 영화에 대한 그녀만의 시선과 그것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글솜씨. 이 책은 빌려서 봤는데 소장해서 두고두고 꺼내어보고싶을 만큼 좋았다. 아래는 책에서 좋았던 부분들을 적어본다. 다 적기는 아까워서.. 추리고 추려서 진짜 좋았던 것만! 나머지는 직접 읽어보시기를.
저자의 여성주의적인 시각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났던 글, 영화 <피아니스트>
일탈 욕망은 젊은/부잣집/도련님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성 해방이며 인간의 성장과 창조를 촉진한다. 자기 세계를 넓히기 위한 남자의 모험이다. 그러나 힘없는 자의 욕망은 역겹거나 최소한 심한 불편함을 준다. (노인의 성과 사랑의 욕망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을 보라) 이자벨 위페르처럼 아버지 없이 어머니를 먹여 살려야 하고 사랑하는 젊은 남자로부터 “그런 몸으로 나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늙고 외로운 여자는 욕망도 선택도 품을 수 없다.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부르주아는 히피요 문화적 전위지만, 가난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단지 초라할 뿐이다.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피억압자의 사회심리적 특징 중 하나는 불안한 미래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확실한 불행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다. 행복은 아무나 즐기는 것이 아니다. (취약한) 여성들은 관계에서 오는 긴장, 관계를 통제(해야)하는 자기 권력을 견디지 못한다. 상대 속으로 들어가거나 상대가 내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자아 경계의 충돌과 협상이 주는 긴장이 해소되길 바란다. 여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기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없애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그대 가슴에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여주인공이 원한 사랑이었지만 그녀의 젠더는 이러한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성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다.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가?
사랑과 삶에 대해 좋았던 글, 영화 <디 아워스>
나는 고1때부터 약 20년 동안 한 달도 연애 상태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이데올로기든 늘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예외 없이 상처로 남았다. 침묵이 두려워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처럼, 나는 자신과 만나지 않기 위해 연애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나를 도피처 삼아 네 인생은 뒷전이었지” 리처드가 클라리스에게 말한 대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할 경우 겪어야 할 너무도 많은 공격들이 두려워 연애 감정 상태를 도피처로 삼았는지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중단 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이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 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 사람들이 왜 결혼하겠는가?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이 끝나서 자발적으로는 그 감정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제도의 힘을 빌리는 거다.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의 상태가 없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살아 있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이고, 움직임은 변화하는 순간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 타인의 손을 잡는 것이 내 영혼에 사슬을 감는 행위여서는 안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글 <밀양>
억울한 일로 평생을 불면의 밤과 싸우고 절망과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장면 중 나머지 한 장면으로 연결된다. ‘신앙의 힘으로 잠시 구조된 듯한’ 여주인공이 교익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의기양양하게 소회를 밝힌다. “하느님이 제게 구원을 주셨으니, 저도 그분께 뭔가를 드려야겠어요.”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의미다. 나는 이 장면에서 ‘피해자’라는 주제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과 동급인줄 알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관장하는 원리지, 나와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상대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감히 갚겠다는 것인가. 이런 황당하고, 망상적이고, 확대된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이후에도 그녀는 물건을 훔치고, 유부남을 유혹하고, 집회 마이크를 끄는 등 계속 하느님과 협상하고, 대결하기를 반복한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일상인데도 고통은 줄지 않는다. 이자에 이자가 붙어 고통은 쌓여만 간다. 이때 유일한 출구는 “나는 순수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다.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런데 이 우월함의 근거는 피해자가 생각하는 정의(justice)가 전부다. 피해=정의도 아닐뿐더러 누가 그것을 공감해주겠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선’ 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글을 읽고 보고싶어서 적어둔 영화 <타인의 삶>에 대한 글
익명의 혁명가. 어떤 지위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가 유일한 고민인 사람. 유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잠시 살다 가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은 찰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고,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다.
나는 죽어도 타인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승부와 경쟁을 즐기고 이기는데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이다. 능력이 부족해 페어플레이를 못하는 유형도 내 옆에 두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자본주의 정신에 어긋난다.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인증인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좋았던 구절. <샤도우 랜드>
그녀의 다른 말은 내게 와닿았다. 나는 이 말을 붙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권리를 포기하고 나니 상실감 대신 엄마를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그 시간까지가 인생이다.
좋았던 구절을 마음에 새기고 싶어서 적어두지만 항상 조금지나면 휘발되어버려서 늘 자책해왔다. 그런데 저자의 '이 말을 붙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있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붙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지.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잡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