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숙, 김소라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30년전에 엄마가 쓴 글을 모아, 딸이 그림을 그려 책을 냈다. 제목은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대구의 독립서점 고스트북스를 들렀을 때 제목을 보자마자 마음이 한 켠이 따스해졌다. 그리고 딸이 엄마의 글을 엮었다는 소개글을 보고는 사기로 결정했다. 30년 전 엄마는 글을 쓰고 싶었던, 그래서 글을 썼던 사람.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며 점점 글쓰는 시간이 줄어들었을테지. 그 대신 아이가 자라는 기쁨과 가정을 키워나가는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 쓰다 남은 글이 남았을 것이고. 그런데 그 아이가 커서 엄마의 소중한 글들을 모아 책을 낸 것이다.
책의 내용은 '당연하다'. 무언가 고민거리를 주는 책이 아니라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도 빤하게 훑어 넘기기보단 그 당연한 페이지 한 귀퉁이를 접게된다. 아무래도 화자가 '엄마'라서 인 것 같다. 그것도 삶이란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혜안을 갖게 된 나이의 엄마가 아닌, 아직 여전히 엄마라는 것이 낯설고 여전히 흔들림과 부침이 많은 엄마라서. 그 어린 엄마가 손으로 꾹꾹 눌러냈을 글들이라, 당연한 말들로 건져진 것들안에 얼마나 진심이 담겨져 있을지가 느껴져 마음에 오래 남았던 책이다. 글에서 좋았던 부분을 '어린 엄마'의 관점에서 소개해보려고 한다.
엄마라서 포기해야 했을 것들에 대하여
90년대에 어린 아이를 재워두고 글을 썼을 엄마. 아직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하고싶은 일과 하고싶은 말들이 많았을텐데 아이와 가정을 위해 조금은 미뤄뒀을테다. 그래서인지 지금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미래를 위한 삶보다 지금이 행복한 삶에 대한 고민과 다짐들이 눈에 띈다. 단순하지만, 아니 단순해서 너무 좋았던 그녀의 삶의 신조. <재미있게 행복하게>
요즘의 내 생활신조는 <행복하게 재미있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지금 재미있게, 지금 행복하게>이다. 나는 지금 너무 진지하게 내일을 준비하느라고, 너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하느라고, 너무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느라고, 번번이 배당받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놓쳐버린 것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게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거라면 나는 재미있게 놀지는 않고 어떻게 노는 게 잘 노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느라 소풍을 끝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이제 깨달은 것이다. 지금이 바로 행복해야 할 가장 알맞은 시기라고. 그리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준비가 안됐으면 안 된 채로 오늘을 열어두고 하루 양의 행복을 채우라고. 오늘이 마감되기 전에.
그러던 어느 날은 가사노동을 하는 다른 주부들에 대하여도 생각했나보다. 1990년대에는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과 육아에 전념하는 여자들이 지금보다도 더 당연하고 더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주부들끼리, 여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씁쓸함도 느꼈을테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그것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 점점 나아지고는 있지만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공감이 될만한 글이다. 특히 한 가정을 꾸려나기 위해선 한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지적. 종교, 학교 모임, 문화센터 같은 작은 숨통을 트는 공간으로 일상의 무감각에 빠져간다는 자각. 따라서 양보하지 말고 움켜쥐자는 그녀의 다짐까지도.
그것은 집안일이 나 자신의 발전과는 무관하다는 점 때문이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와이셔츠 다리는 것과 같은 가사노동의 반복은 나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가정은 내 재능을 펼칠 무대가 되지 못한다. 아무리 가사 일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집안 일의 쳇바퀴에 시달리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나는 무언가 하는 탄식이 새어 나오게 된다. 한 가정을 안정되게 꾸려 나가는 데에는 한 개인의 능력 포기가 전제되고 있지 않은가.
집 밖 진출을 체념한 그녀들은 이웃을 사귀며 종교 활동으로 학교 교육 참여로 문화센터의 취미 생활 등으로 아쉬운 대로 숨통을 트일 활동 공간을 만들며 우울과 짜증을 다스려간다. 주부라는 느긋한 집단의 일원이 되어 조금씩 일상의 무감각에 빠져들면서.
여성이 시들어가고 있는 이 현실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증대되고 개인의 행복이 중시되는 이 시대의 가치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실상이다. 집비둘기는 집에, 솔개는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선택의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여성만의 비극일까. 자신이 일을 가져야 행복한 성취형의 여성이라고 판단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양보하지 말고 움켜쥐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일상의 무감각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혼자 아주 잠깐의 행복을 느낀 것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는 학교에 보내고 나서 텅 빈 집에서 혼자 보내는 오후 시간에 대하여. 이 담담한 서술이 너무나 소박하고 솔직해서 약간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나는 가끔 혼자만의 주방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부지런한 주부라서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거나 알뜰히 씻고 닦으며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냉장고를 뒤져 비닐봉지에서 오징어포를 한 움큼 집어내어 싱크대 귀퉁이에 놓고 혼자 맥주 한 잔 따라 마실 때, 외출했다 허기져 돌아와 부리나케 초고추장을 만들어 국수를 삶아 무쳐 먹을 때, 책을 읽다 밤이 깊어 시장기를 느끼고 계란 후라이를 해서 케찹을 살짝 쳐서 먹으며 커피를 한잔 탈 때, 그럴 때 나는 느닷없이 행복감에 취한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영역에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데에는 근원적인 즐거움이 있다. 혼자! 혼자라는 말에는 얼마나 자유가 들어 있는가.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책의 제목처럼 사람에 대한 희망이 곳곳에 묻어난다. 아무리 각박한 사회, 팍팍한 삶이라도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 전체를 보면 경제는 어렵고, 사회는 불평등하고, 각각의 이해 집단은 충돌하고 있지만 그 안을 세밀히 보면 사람과 사람 간의 이어진 끈이 있다는 것. 더욱 개인화되고 쪼개진 지금, 모두가 익명이 되어 그들이 이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권리마저 지워져버린 지금 이 시대에 사람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이 글은 위로가 됐다. 그래서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새삼스럽게 다짐하게 했다. 좋은 숲이 되어, 새가 날아들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말이다.
그 여성의 사람을 대하는 세심한 마음 씀과 성실. 그것은 내가 늘 붙잡고 싶고 또 이것만은 내가 붙잡아야 할 중요한 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각박한 일상에 휩쓸려 놓치곤 말고 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 편지는 잊고 있었던 사람 간의 즐거움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는 말이 있다. 숲이 좋으면 번쩍이는 잎을 자랑하지 않아도 미끈한 가지를 뻗어 유혹하지 않아도 자연 새는 날아든다. (중략) 깊은 골짜기의 이해심과 아늑한 오솔길의 배려와 맑은 샘물의 친절, 시원한 바람의 솔직함, 그리고 들꽃의 그윽한 향기 같은 위로를 갖춘 숲. 사람을 소중히 다루고 사람에게 성심껏 대하고 성의를 다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 사람에게 성실한 것. 세상에 많은 이념이 있지만 정말 사람의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이념이라면 이것이라고 믿어진다.
무엇이고 길들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쌓여야 한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오랫동안 내 곁에서 길이 든 것은 단순히 편안함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어린왕자는 “그 장미가 귀한 것은 내가 직접 물을 주고 내가 벌레를 잡아주며 그것을 위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들이기 전에는 서로가 몇천 몇만의 흔해 빠진 존재에 불과하지만 일단 길들이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속에 그것과 함께 한 나의 지난날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모든 이야기는 마치 어떤 음악의 서곡처럼 그렇게 어느 날 나의 공간 안으로 찾아드는 그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다. 처음 낯설음의 조심스러움과 기대를 가지고 전혀 다른 개성을 알아가는 것보다 흥미로운 일이 있을까. 한 사람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만남.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만남. 그러한 만남이야말로 짧은 순간의 만남이라고 해도 영원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만남은 내가 가진 가치에 대해 새로 눈뜨게 한다. 참다운 만남은 나 자신에게 내재해 있던 가능성의 씨앗을 틔우게 하고 내 능력의 최대치를 이끌어 낼 열정을 깨워준다. 누가 우리 인간은 만남을 통해 <되어져 가는 존재>라고 했던가. 우리는 타인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영항받으며 그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것이다. 한순간의 만남에서 영원한 만남을 꿈꿀 수 있는 사람은 늘 사람과 삶에 대한 관심과 탐구로 깨어있는 사람이리라.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그녀가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던 시간을 계절로 생각해보면 무덥던 여름의 끝자락즈음 일 것 같다. 몰아치던 20대를 지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쌓아갈때 즈음. 여름에는 더운줄도 모르고 앞을 향해 달려나가지만, 그 여름이 끝나갈 때 쯤 불어오는 선선한 느낌의 바람은 마음을 헛헛하게 한다. 아마 그녀의 인생은 딱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달려왔고, 조금은 허무한 느낌의.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생명을 번식시키고 뿌리를 깊게 하고 뻗어 오르게 하는 이 왕성한 기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람으로 치면 20대 초반의 열정과 광기마저 지는 계절, 여름은 그야말로 젊은 계절이다. 많은 후회와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여름을 거치지 않고야 무엇인들 성숙할 수 있으랴. 영원히 떠날 것 같지 않던 한 여름의 더위도 8월을 넘기면 한 풀 꺾인다. 사실 이때쯤이면 조금씩 지쳐 가는 나에게 9월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반가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름이 갈 때쯤은 깊은 가을보다 더 쓸쓸하다.
그런 순간이 오면 여유로워짐과 동시에 허무함이 들 것 같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나 싶은 생각도 들 것이고. 그래서 그녀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떤 단단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조금은 쓸쓸한 느낌도 베어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간다.
가끔 회사에서도 이미 깊은 가을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너지가 가든 찬 삶을 사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회의론적으로 말하기 보단 여전히 희망을 말하는.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든,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든, 회사의 비전에 대해 말할 때든. 그런 분들을 뵐 때면 나도 모르게 조금은 '그래, 괜찮아질거야'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요즘은 많이 많이! 만나려고 한다. 그래서 힘을 받으려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 건강한 에너지를 나눠주려고. 아직은 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힘을 내어준 이 책 속의 어린 엄마처럼.
좋은 이웃이란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등산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자기 코스를 가고 있는 사람 말이다. 열심히 사는 그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내 삶에 관심을 돌리게 한다. 나는 지금도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준 여러 사람을 생각해 낼 수가 있다.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더 많은 좋은 이웃이 내 생활을 바로 이끌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지금 지난 일을 돌아보면 다른 기억들은 희미해졌어도 유난히 즐거움 속에 뚜렷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치렀던 그때의 크리스마스 행사와 그리고 그것처럼 세심하게 정성을 쏟으며 해냈던 다른 몇몇 일들이다. 그 일들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가졌던 의욕과 열성 그리고 그것이 잘 되었을 때의 만족감 같은 것들만 기억의 저 편에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남아있다. 그것은 언제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보람으로 되새기게 된다. 지금까지의 내 생활을 통해 남겨즈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에든지 정성을 다 했던 그 창조적인 행위뿐이다. 사람의 행복은 일신의 안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에 빠져 열중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것에도 마음을 쓰며 전념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동극 연습을 하며 아이가 대사를 외며 걸을 때 발검음 수를 세는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