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웹 감독의 '백설공주' 리뷰
사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낭만적이지도 않았고 그리 예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가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뭔지 몽글몽글하고 폭신폭신한 감정이 남는데 대부분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때론 허황되기도 하고 때론 간절하기도 했던 우리 꿈 덕분이다.
아이들은 늘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눈을 감고도, 눈을 뜨고도 꿈을 꾼다. 나를 가둔 이 어두운 방에서 나를 구해줄 왕자님이, 피터 팬이, 요술 할머니가, 쟈스민 공주가 나타날 거라 믿는다. 앨리스 덕분에 지금 나는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낙하하는 것이라 믿을 수 있었다.
익숙함과 정치적 올바름 사이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 밤 태어난 백설공주(레이첼 지글러)는 온정이 넘치는 왕국에서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둠의 힘으로 왕국을 빼앗은 여왕(갤 가돗)의 계략으로 생명을 잃을 뻔 하지만, 달아난 마법의 숲에서 일곱 광부의 도움으로 지낸다. 백설공주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여왕은 독 사과로 그녀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한다. 백설공주는 빼앗긴 왕국을 되찾기 위해 여왕과 맞선다.
줄거리와 분위기를 보면 알겠지만 2025년의 실사판 ‘백설공주’는 그림 형제의 동화가 아니라 1937년 제작된 월트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원작으로 한다. 아름답지만 나쁜 여왕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공주, 왕자는 아니지만 백설공주와 사랑을 나누는 의적 조나단, 그리고 개성이 강한 7명의 난쟁이 등 익숙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로 우리나라의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지만 영어의 페어리 테일(fairy tale)은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마법이나 상상의 환상적 존재들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이야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판타지에 기반을 둔 이야기로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디즈니의 ‘백설공주’를 비롯한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 페어리 테일에 가깝다.
최근 페어리 테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들과 이야기가 차별적이라는 비판에 따라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반영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인종, 성별, 장애, 종교, 직업 등에 관한 편견이나 차별이 섞인 언어 또는 정책을 지양하려는 신념, 혹은 그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사회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디즈니는 ‘미녀와 야수’에 게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인어공주를 레게 머리를 한 흑인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틴계의 백설공주를 통해 소수자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주 오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낭만적 정서와 어린 시절의 판타지가 1차원적인 변화만으로 지워지진 않는다. 어설픈 변화 때문에 낯설다기보다 왜 이래야 하는지 줄곧 어리둥절할 뿐이다.
낯설지만 새롭지는 않은 따분함
세상을 낯설게 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익숙해서 그냥 넘어갔던 문제를 바르게 투영하는 새로운 거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백성공주’가 투영해 보여주는 풍경은 낯설긴 하지만 전혀 새롭지 않다. 눈처럼 하얘서 백설(snow white)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원작의 설명과 달리 눈보라가 몹시 쳤던 날에 태어나서 백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설명부터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없다.
라틴계 배우가 백설공주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다. 백설공주의 상징인 삼원색 의상을 재해석 없이 그대로 입은 레이첼 지글러의 모습은 솔직히 너무 촌스러워서 대형 마트에서 파는 공주 옷을 사 입은 철부지 소녀처럼 보인다. 어중간한 단발 역시 어색하다. 따져보면 피부색 말고 뭐가 달라졌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발랄한 성격을 강조하다보니 간혹 예의 없어 보이는 표정과 태도 때문인지 내면의 아름다움조차 원작의 백설공주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작의 플로리안 왕자의 존재를 지우고 대신 조나단이라는 캐릭터가 들어갔는데 흔히 보는 전형적인 도적일 뿐 역할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조나단은 그저 왕자가 아닐 뿐 실질적으로 공주를 도우고 키스로 깨운다. 왜소증 배우들을 배제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던 일곱 난장이 CG는 기묘하게 어색하고 현실감이 없다. 어정쩡한 관계 설정 때문에 백설공주와 난쟁이들 사이에 언제 친근함의 감정이 생겼었나 갸웃하게 된다.
자기주장을 따박 따박할 뿐 백설공주는 전혀 주체적이지 않다. 그냥 타고난 공주 캐릭터로 사람을 쉽게 부리고,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교화시킬 뿐이다. 여왕에게 속아 독사과를 덥석 베어 물어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남자의 키스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덜 자란 성격이야 말로 이번에 제대로 바꿨어야하지 않았을까 싶다.
디즈니는 항상 전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사랑받아왔다. 믿어보고 싶은 판타지, 언젠가는 이뤄질 것 같은 꿈을 담은 선물상자 같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은 아직도 따뜻하게 기억된다. 하지만 2025년의 ‘백설공주’는 20세기를 살았던 어른들에게 어린 시절의 낭만을 추억할 수 있는 기회도, 21세기를 살아갈 소녀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는 따분한 이야기가 되었다.
21세기 소녀라도 낭만적 꿈을 꿀 수 있다고, 꿈을 꾸면서 살아남아도 좋다고 긍정할 순 없었을까? 단, 악한 것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남의 도움을 받기 전 본인부터 단단해져야 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21세기 소녀라면 공주라는 신분과 사랑에 집착하기 보다 더 공정하고 바른 것들을 스스로 성취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소녀들을 긍정하고 격려할 수 있다면 그게 판타지면 또 뭐 어떤가?
[영화음악 정보]
다행히 일부 원작의 곡을 리메이크하고 대부분 새롭게 만든 뮤지컬 넘버로 채워진 음악은 여전히 디즈니스럽게 완성도가 높은 편이고 레이첼 지글러는 꽤 소화를 잘하는 편이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OST들이 명곡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Heigh-Ho’나 ‘Whistle While You Work’같이 리메이크된 뮤지컬 넘버 역시 원작만큼이나 잘 들린다. 실사영화에서 새로 작업된 곡들도 아름답다. 하지만 원작의 가장 상징적인 노래인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은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설정 때문에 빠졌는데, 워낙 정서적으로 아름다운 곡이라 아쉽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