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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값, 나이의 값

명예퇴직 시즌 (2)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쓸쓸했던 20대,

아직 과거보다 미래가 더 멀리 있는 것 같아 지루했던 30대,

이대로 살아도 되나 고민했던 40대,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싶은 50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늘 우리의 나이를 고민한다.


그리고 정해진 틀에 맞춰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비난의 말을 듣는다.

나이값 좀 하라고.

나이에 값을 매겨 값어치를 하라는 소리를 듣는 나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떤 행동 앞에서도 신중해지는, 신중해져야 하는 그런 나이다.


그런데 평소 진중하고 신중한 나의 동료가

평소 진중하지도 못하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나보다 앞서 큰 결심을 했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다.


퇴직을 한다는 동료 앞에서 나는 적당히 해 줄 말이 없어서 멍했다.

남들이 보기에 꽤 적당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잘 웃고, 적당히 사람들과 어울리고, 적당한 직장에, 적당해 보이는 여러가지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축하 겸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니 문득 내 삶은 괜찮은지 궁금해졌다.

불쑥 시간의 돌부리에 걸려 털썩 주저앉는 날에는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이런 상태로 내일을 맞이해도 후회가 없을지 자꾸 묻게 된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의 편집장이 되어 지지부진한 내 삶의 어떤 꼭지를 폐지할 수 있다면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신설할지 상상해 본다.


직장을 다니기로 작정했다는 건,

내 의지와 상관없는 변화도 내가 바꿀 수 없는 큰 덩이도 감당하겠다는 거지만

이별은 뿌리가 흔들리는 일이라 여전히 어렵다.

생각해보니 이 삭막한 직장 생활 속에서도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좋은 사람들은 직자엥 오래 머물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꽤 많은 이별을 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이별은 늘 어렵다.

그냥 괜찮은 척 하는 일에 능숙해질 뿐, 이별은 능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느리게 쌓아올린 사람들과의 관계가 찢어지는 일은 적응되는 일이 아니라 여전히 괜찮지가 않다.


하지만 나이를 들어보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시간이더라.

시간이라는 친구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상처도 어떤 위기도 동그랗게 만들어 모서리에 부딪혀도 아프지 않게 해 주는 말 없는 친구이기도 하다.


81dfcf9b-eb91-47fc-a930-0e603da55ce4.png '나이값'을 그려달라고 했더니 ChatGpt가 그려준 이미지

(다음 화에)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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