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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이 구원이라는 모순 혹은 진실

요그로그 란티모스의 '부고니아' 리뷰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6.jpg '부고니아' 스틸 컷

무지한 불신을 가진 사람과 재앙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혐오한다. 하지만 불신과 믿음은 어떤 면에서 동전의 양면, 혹은 머리를 나눠 가진 샴쌍둥이처럼 비슷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설득해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딱딱하고 틈이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맹신하는 사람과 의심이 강한 사람의 타고난 마음은 누구보다 연약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패를 찾다가 자신을 꼭꼭 닫은 것일 수 있다.


불신과 믿음이라는 모순

거대 바이오 기업의 물류센터 직원인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벌들이 사라지고, 지구가 병들어가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유가 외계인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는 사장 미셸(엠마 스톤)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믿고, 함께 사는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결국 미셸을 납치한다. 지하실에 그녀를 가두고 지구를 찾아온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을 캐묻지만, 미셸은 자기는 외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개봉 당시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대상,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지만 기괴하고 난해한 이야기 때문에 관객들까지 매료시키지는 못했다. 2020년 ‘미드 소마’의 아리 에스터가 연출을 한다는 소문 때문에 주목받았다. 결국 논점은 강렬하지만, 그 표현은 모호한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을 맡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더 랍스터’, ‘킬링 디어’, ‘가여운 것들’을 통해 기이한 상상력으로 인간 본성의 모순과 부조리, 권력과 사회적 억압 관계를 차갑고 우화적으로 탐구해 왔다. 심리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비현실적 설정을 어느 순간,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로 설득하는 재주를 부려왔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만큼이나 특이한 원작은 매혹적이지만 변주 가능성이 큰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고니아’는 기이하고 장난스러운 상상력이라는 원작의 장점을 취하지만 원작에 갇히지도, 원작을 해치지도, 원작을 생각나게도 하지 않는 완전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났다.


란티모스 감독은 자본주의와 외계인 음모론이라는 소재를 뒤섞는다. 주인공 테디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변두리에서 생존하는 이방인 같은 다수의 노동자를 대변한다. 날카로운 두뇌와 달리 신체의 움직임이 둔한 우리를 닮아 냉소적이지만 무력하다. 흥미로운 캐릭터는 미셸이다. 원작의 중년 남성이 아닌 젊은 여성 CEO로 설정하여 권력과 젠더의 구조를 변주한다.


이 변화는 고용주와 노동자, 즉 권력과 약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보다 깊고 복잡하게 만든다. 엠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서로의 입장을 드러내며 관객이 누구 편에 설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테디의 맹신을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미셸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관객들이 눈치를 보는 사이, 란티모스는 믿음과 의심의 경계선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단지 지구만 구하는 이야기

죽음을 통한 소멸이 곧 구원일 수 있다는 역설은 오래된 신화에서부터 ‘부고니아’까지 이어진다.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빌리자면,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는 오직 지구를 지키려는 이야기와 함께 인간을 되묻는다. 외계 존재로 의심받는 미셸이 실제로 외계인이라면, 그녀의 임무는 지구의 생존일 것이다.


반면 테디는 인간, 더 나아가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외계인과 접촉하려 한다. 그러나 란티모스는 끊임없이 묻는다. 지구는 누구로부터, 무엇을 위해 지켜져야 하는가. 그 질문 속에는 지구의 생명체를 오직 인간 자신으로 한정 짓는 근원적인 자기기만과 오만이 있다.


팬데믹의 시절을 지나며 우리는 인류의 유한함을 목격했다. 인간의 활동이 멈추자 오히려 자연이 회복되고, 하늘과 바다가 맑아졌다. 그 광경은 문득 이런 생각을 불러왔다. 인간에게 닥친 재앙은 혹시 지구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생존 방식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몇 해가 지나자, 우리는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오류를, 같은 속도로 반복하고 있다.


‘부고니아’라는 제목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태어난다는 미신적 재생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결국 죽음을 통한 재생, 소멸을 통한 구원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인간보다 한층 우월한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 신화적 원형을 따르는 것 같다.


벌은 생태계의 조화를 유지하며 균형을 이루는 존재지만, 동시에 완전한 군집으로서 집단의 질서에 절대복종한다. 테디가 벌의 사회를 이상으로 여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방인으로 살아가지만, 단단한 벌집 구조의 밖이 아닌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모순된 욕망의 은유처럼 보인다.


‘부고니아’는 인간의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지금까지 인류는 파괴되고 소멸하는 것을 멸망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다른 생명체의 생존과 부활이 될 수도 있다. 란티모스 감독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미래를 예언하는 것으로, 이 의심 가득한 소동극을 마무리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인간들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지구 위, 오직 인간의 시간만 뚝, 멈춘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에게 기대어 살아온 지구 위 생명체들에게 그것은 구원일까? 또 다른 생존의 시작일까? 지구는 정말 인간을 필요로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종말의 순간,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에 의해 진짜 한번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면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영화음악 정보 / 밀란 레코드/ 음악감독 존 카아다

란티모스 감독은 의도적으로 감정의 이질감을 주기 위해 음악을 사용한다고 한 적이 있다. 관객들은 정서와 음악의 충돌을 느끼게 된다. 고요한 장면에 갑작스럽게 음악이 요란하게 들린다거나,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곳곳에 배치된다. ‘부고니아’에는 팝, 클래식, 실험적인 음악, 불협화음으로 가득하다. 정서와 음악이 어긋나는 순간, 어쩌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쓸쓸함을 배반하는 듯한 일종의 카타르시스 같은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기묘하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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