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큰딸의 추천으로 브런치를 시작했다. 내가 쓴 글이 아무 곳에도 쓰이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딸의 성화에 못 이기듯 도전했는데, 첫 시도에 합격했다. 이젠 독자가 있는 어엿한 브런치 작가가 되어 정기적으로 글을 올린다. 어릴 적의 기억, 추억하고 싶은 것, 복지관에서의 일화 등을 담담히 서 내려가며 일상을 기록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파란색의 표지판은 내게 손짓을 합니다. 쓰라 또 쓰라고…
한 문장밖에 쓰지 못한 나는 초조합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작가는 글을 잘 쓰는 작가일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말을 머리에 새깁니다.
오늘도 나는 브런치스토리로 출근합니다.
대구일보에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2022년 4월이었다. 갈고닦고, 고치고 고쳐 심혈을 기울여 “드르륵 털털”이라는 글이 완성됐다. 결과는 낙방. 서글펐다. 힘이 빠졌다. 딸은 괜찮다며, 겨우 한 번 떨어진 거라고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것 같다. 홀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은 엄마의 재봉틀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엄마의 재봉질 소리를 들으면 즐거웠다. 드르륵 털털 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보리타작의 경쾌한 장단이 떠올랐다. 햇빛이 유난히 따갑던 날, 보랏빛 포도송이같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를 바라보며 재봉틀에 앉은 엄마를 떠올린다. 옛날 그 재봉틀 그대로다. 정갈하게 쌓여있는 한복일감, 재단가위, 줄자,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엄마의 재봉질은 한결같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우리 집 형편이 별안간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달라지진 않을 것이었다. 내가 오로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가 바라는 대로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어엿한 직장을 가진 여성이 되기 전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50대 후반부터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가사를 돌보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남편과 두 딸의 전폭적인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를 위해 버스를 타고 가며 낱말카드를 눈에 익혔다. 바쁜 생활 속에 몸을 돌봐야 해서 잰걸음으로 시간을 다투고 숨차게 달렸다. 어깨에 멘 배낭 속 책들의 무게만큼 나의 지식이 두터워 지길 바랐다.
엄마가 자식을 건사하고 교육하기 위해 마름 서리서리 쓴 울음을 삼키며 살아오셨다는 것을 철없던 내가 얼마만큼이나 이해했겠나? 경제력이 부족했던 아버지 또한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라 엄마 자신을 다독였을 모진 세월을… 그것은 바람 없는 바다같이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조용하지만 셀 수 없는 많은 생물들이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바닷속 깊은 곳이었을 게다.
인생이란 마차가 어느덧 종착역을 바라본다. 오전 시간대에 도서관은 나만을 위한 책방이다. 오늘도 나는 네 번째 창가 자리에 앉는다. 바쁘고 무심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30대 이후부터 진정으로 위안받으며 여태껏 살아왔다. 물론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왔던 시와 산문 그리고 소설 등이 생생히 기억나지만, 그것은 울림이 없는 학습이었다.
가정을 이룬 후 나는 절실하게 책 속의 지혜를 갈구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제대로 이해받기를 바랐다. 그러기에는 내가 세상 이치에 어두워서 엇나가고 헷갈렸다. 이해하지 못할 어리석음으로 마음의 괴로움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책 속의 글들을 읽으며 오늘이 힘든 이유를,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깨달음을, 그리고 책 속 저자와 나누는 고요한 대화가 나에게 조금씩 와닿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어떤 힘든 시간도 거뜬히 이겨낼 넉넉한 용기를 열심히 찾는 중이다. 엄마의 경쾌했던 재봉틀 소리가 나를 잡아당긴다. 부지런히 그 어떤 투정이나 불만 없이 드르륵 털털거리던.
— 여비 브런치 ‘드르륵 털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