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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Nov 10. 2023

견뎌온 시간의 깊이를 고스란히,
평화의 땅 철원의 가을

-느린 시간 속으로 걷다. 억겁이 빚은 계곡 '한탄강 팔경'

 





철원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멀지도 않다. 알고 보면 생각난 김에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DMZ가 인접해 있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폭포가 지금도 쏟아져 내린다. 아득한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 이야기와 임꺽정의 무대였던 지역임을 떠올린다면 혹시라도 거기가 조금은 먼 곳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도권 기준으로 약 두 시간 정도 거리다. 다가갈수록 북녘을 눈앞에 둔 철원 평야는 황금들녘이다. 절벽에 매달린 한탄강 협곡의 주상절리 길은 스릴 넘치게 아찔하다. 전쟁을 대비하고 군부대 포사격 훈련장이었던 땅엔 백만 송이가 넘는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이 땅의 최북단 철원의 풍성한 가을이 마냥 아름답다.   

       

-마음을 두드리는 평원의 가을

가을을 마음에 담기엔 이 땅의 드넓은 평야만 한 곳이 있을까. 누렇게 물들인 대자연과 넓은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강원도 최북단 철원의 소이산은 다른 지역보다 가을이 먼저 시작된다. 새벽부터 분주히 달려서 도착한 소이산 주변으로 운무가 가득하다.  


소이산은 해발 362m의 야트막한 산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금방 오를 것 같은 높이지만 제법 가파르다. 20여분 숨차게 오른 소이산 전망대는 본래 군부대 주둔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오르막 길목의 평화마루공원에선 공원과 지질명소를 안내한다. 오래 전의 미군 막사와 초소는 녹슨 채 허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처의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인 봉수대오름길로 이어지는 코스도 보인다.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비로소 가을을 흠뻑 맞는다. 황금빛 너른 들녘의 놀라운 풍광이 전망대를 중심으로 둘러쌓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산야는 거대하다. 무한한 대지와 하늘, 철원 북쪽의 평강고원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도록 막힘없이 탁 트였다.     


 

철원 평야에 오름처럼 우뚝 솟은 자그마한 소이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던 봉수대가 위치하던 곳이다. 철원의 역사를 기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철원 평야 저 너머엔 비무장지대가 있다. 6.25 전쟁 시 김일성이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해서 사흘을 울었다는 고지도 새벽 운무 저쪽으로 아련히 보인다. 맑은 날에는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도 보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던  DMZ 건너편 철의 삼각지대를 미묘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최북단 철원은 가을이 일찍 찾아온 덕에 추수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9월 초부터 시작해 시월이 되면 조생종 벼들은 일찌감치 수확을 끝낸다. 이미 추수를 한 논과 벼가 익은 상태에 따라 논과 논의 채도대비가 다양하다. 끝없이 넓은 패턴의 선과 면의 들판은 한 편의 작품이다.     


철원 평야에서 생산되는 오대쌀은 우리에게 이미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용암대지와 현무암의 풍화로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청정환경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과 밥맛을 결정하는 천혜의 기후조건 또한 으뜸이다. 한국전쟁 시 철원평야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의 패배로 김일성이 이 지역을 빼앗기고 슬퍼했다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철원오대(鐵原五臺) 쌀은 지역특산물로 국내 최초로 브랜드화한 이름이기도 하다.   

  


소이산을 내려오는 길 양쪽으로 아침이슬을 매달고 있는 가을 들꽃들이 이쁘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나 유난히 색감이 선명하고 맑다. 숲길의 쾌청함으로 절로 힐링된다. 이른 아침에 올랐던 소이산을 내려오니 막 운행이 시작된 모노레일이 지나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편치 않은 교통 약자라면 소이산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을 탑승하면 왕복 1.8km의 거리다. 주변으로는 노동당사가 있어서 가볼 만하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북한의 노동당사였으나 전쟁의 크나큰 상흔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데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평화의 꽃을 피워 올리다

아침햇살에 빛나는 것이 이슬뿐일까. 소이산 전망대에서 20분 정도 거리의 철원 고석정 꽃밭에선 가을 정취가 눈부시게 빛난다. 강원도 북단에 이토록 넓은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니 꽃 따라 봄가을로 여행 한 번 떠나볼 만하다. 입구에서부터 짙은 빨강과 다홍, 노랑의 색감으로 화려한 융단처럼 맞는다. 꽃명이 촛불 맨드라미다. 바로 옆으로 고향마을에서나 본 듯한 백일홍도 제각각의 색깔로 꽃밭 가득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마음껏 한 판 즐기는 꽃마당이다.     


꽃밭 넓이가 자그마치 23만 1000㎡이라고 한다. 축구장 서른 개가 넘는 규모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한참 걸린다. 맨드라미를 시작으로 백일홍, 천일홍, 메밀꽃, 해바라기, 장미, 코스모스, 코키아, 가우라, 바베나, 핑크뮬리, 댑싸리, 억새 등 종류별 가을꽃들이 눈부시다. 봄 시즌에는 노란 유채꽃이나 수레국화, 안개초 등이 피어난다. 꽃길을 걷다 보면 때론 연못이 나타나고 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어린 왕자 조형물이 있는 전망대와 풍차가 볼거리를 더하는데 일몰 풍경과 꽃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편안하게 꽃구경을 하고 싶다면 꽃밭을 한 바퀴 도는 깡통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고석정 꽃밭은 애초에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었다. 과거 Y진지라 불리던 곳이 철원지역의 새로운 관광트렌드로 변신했다. 포성이 울리던 허허벌판에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철원이 안보관광지로만 알려져 있을 법 한데 무한히 넓은 꽃밭에서 계절별 꽃의 물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직 벼랑길을 한걸음 한 걸음태고의 신비 주상절리 

철원의 주상절리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해 있다. 화산이 폭발하고 분출한 마그마가 서서히 식으면서 현무암이 되었고 강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바위들이 수직의 벼랑을 이룬 비경을 그동안은 배를 타고 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아찔한 절벽에 선반처럼 매단 3.6km의 잔도가 마련되었다. 일명 한탄강 하늘길로 불리는 잔도(棧道) 덕분에 빼어난 천혜의 자연환경을 초근접으로 생생히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의 출발점은 두 군데다. 순담게이트와 드르니마을 게이트가 있는데 대부분 순담매표소 출발을 한다. 참고로 드르니는 애초에 양지바른 마을에서 유래되었는데 궁예가 고려 왕건으로부터 피신할 때 '들른' 마을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 철원 여행을 하다 보면 유난히 궁예와 연관된 명칭들을 자주 본다. '말등소'라는 소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길 때 빠졌던 소(沼)로 말이 너무 힘들어 똥을 쌌다 하여 말똥소라고도 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시작점으로 다시 가야 할 경우에는 셔틀버스가 있는데 현재는 주말운행만 한다.   

       

잔도는 걷기에 따라 다르지만 약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우리나라에 잔도가 몇 군데 있는데 철원 한탄강의 주상절리길의 잔도는 그 절정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 지상 20~30m 이상 높이의 벼랑길에 매달린 잔도를 걷기 시작하면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의 위용에 놀라고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허공에 떠있는 듯 반원형의 전망대는 아찔함의 최고점이다.     

  

틈틈이 쉼터가 나타나니 잠깐씩 쉬면서 절경에 잠겨보아도 좋다. 쪽빛소쉼터, 맷돌랑쉼터, 돌단풍쉼터, 드르니 쉼터 등 이름도 예쁘다. 자주 나타나는 13개의 출렁다리마다 지질이야기가 담겨있다. 생김새와 위치 등에 따라 돌개구멍교, 한여울교, 선돌교, 수평절리교, 단층교 등으로 이름 붙여졌다.    

     

잔도 위를 한참 걷다 보면 신나고 짜릿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간이 허공을 걷듯 공포감이 생기는 구간도 지나야 하고 가파른 오름계단을 몇 번씩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기진맥진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체력조절이 필요하다. 감동과 스릴, 억겁이 빚어낸 경이로움의 철원 주상절리 길이다. 








  https://bravo.etoday.co.kr/view/atc_view/1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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