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났던 곳을 다시 걸어보는 일에 대하여
새로운 무엇을 아주 천천히 잠깐 접하고 놓아버리는 일이 잦았다. 의지가 모자란 듯한 선택이 늘어갔다. 마음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할 이유보다는 포기할 이유가 더 선명했다. 지금 보니 시작할 마음이 드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조차 에너지가 필요했다.
차갑고도 따뜻한 거리
낮보다 밤이 익숙했던 거리. 해질 무렵에 걸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지하철역까지 그저 걸어가는 것. 하지만 총알택시를 타는 게 일상이었다. 우연히 같은 기사님을 다시 만났을 때 반갑다고 웃어야 하나 싶었다. 그 시절, 왕복 16차선을 지나던 밤바람은 더워도 추워도 늘 차갑기만 했다.
그래도 가끔은 금요일 밤이면 마찬가지로 야근에 시달렸거나 나를 짠하게 여긴 친구들이 찾아오곤 했다. 떠오르는 대로 꺼낸 말을 묵묵히 받아주던 친구들. 함께 심야영화를 보고 병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웃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의 밤거리는 따뜻했다.
오늘은 책임 제로 구경꾼
길치인 내가 코엑스몰의 지리를 전부 다 익혔을 무렵, 그 거리를 떠났다. 어쩌다 한 번씩 그 동네를 가면 항상 그 시절이 생각난다. 현대백화점을 올려다보았다. 급하게 바이어 선물을 사느라 허둥대던 날이 생각났다. 에이샵 앞에서는 갑자기 사무실을 뛰쳐나가 아이패드를 일시불로 긁었던 날도 떠올랐다. 오늘도 그랬다.
모처럼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든 덕분에 다시 온 동네. 전시회를 가기 위해 큰맘 먹고 휴가도 냈다. 예전에는 전시홀에서 뾰족한 구두에 탑승한 채 온종일 서 있었지. 며칠 뒤 홍보팀에서 어르신들과 내 얼굴이 박힌 보도자료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흘러간다. 적당히 찍먹하면 돼. 싫증 나면 바로 끝.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햇살이 좋아 이대로 휴가를 끝내기 아쉬웠다. 빵빵하게 부른 배를 잡고 봉은사에 들어섰다. 저 멀리 익숙한 카페가 보인다. 매일 커피 내기를 종용하던 팀장이 떠오르네. 그 당시 봉은사에 가본 적이 있을까? 혹시 그렇더라도, 어차피 강제 등산처럼 끌려갔을 테니 다를 건 없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으니까.
도시 한 복판에 있어서 더 이색적인 절.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대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으니 새삼 여기가 서울인가 싶다. 가끔 숨을 돌리러 왔다면 어땠을까. 새 소리나 숲내음이 이렇게 포근한데. 하지만 사실 지금 회사 근처도 좀처럼 가지 않는다. 떠나야만 여유로운 마음으로 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동네는 여전히 선뜻 정이 가지 않는다. 혼자서 배회하기 좋았던 영풍문고가 없었다면, 누군가와 함께한 좋은 날들이 없었다면 영원히 마음에서 지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소소한 기억 덕분에, 오늘 이렇게 다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