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에 Jan 04. 2017

겨울비 내리는 숲

제주 ‘절물자연휴양림’

며칠 동안 구름이 촘촘하게 쌓였다. 예상기온을 보고 비나 눈을 어렴풋하게 짐작해본다. 함박눈이 펑펑 내려야 겨울다운 느낌이지만, 막상 눈발이 굵어지면 걱정이 앞선다. 눈 뭉치를 굴리던 시절은 지나가버렸고, 출퇴근의 압박에 사로잡힌 날들이다. 올해는 추위와 구름의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인지, 아직은 눈이 낯설다.  



절물자연휴양림

곧게 자란 삼나무가 반듯하게 줄지어 선 숲. 잘 닦인 산책로를 거닐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등산로를 따라 절물오름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완만하고 널찍한 산책로는 유모차나 휠체어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올 때도 그만의 정취를 품고 있기에, 언제 누구와 가더라도 괜찮다고. 



하루 종일 구름이 떠나지 않는 날이다. 바람은 세상 모든 자유를 가져간 것처럼 제멋대로 불어댄다. 아랫동네는 심기가 불편한 하늘이 뿌려대는 비에 흠뻑 젖었다. 잠시 잦아든 빗줄기를 틈타 숲으로. 이런 날에는 뾰족한 이파리를 가진 나무도 꽤 괜찮은 바람막이가 되어준다. 어느 정도까지는 간이 우산으로도 쓸만하다. 

숲을 걷는다
어루만지는 빛, 감싸는 향기

-라이프앤타임 ‘숲’



오가는 동물들의 바스락거림이나 새들의 대화, 빗방울이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가 겨울 숲을 울린다. 무심하게 툭, 툭, 분주하게 두두두, 청량하게 꺄르륵. 상록수는 초록을 과시하며 스산한 공기를 데운다. 파란색 대신 구름 색을 배경에 깔아도 푸름은 쉽게 묻히지 않는다. 한 해를 다 살아낸 낙엽이 붉은빛을 더하니, 파스텔화를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빗소리가 조금씩 커지자, 헐벗은 나무 사이에  안개가 차올랐다. 점점 짙어지는 회색빛. 채도가 낮은 풍경에 익숙한 겨울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이끼의 연두색이 더욱 쨍하게 느껴진다. 습한 기운을 타고 살뜰하게 자란 녀석들은 누구보다 신이 난 것 같다. 모두가 잠든 것 같은 계절에도, 삶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다. 



해일처럼 밀려든 짙은 안개 때문에 숲은 더 이상 간이 우산이 되어주지 못했다. 빽빽한 나무들이 천천히 지워져 간다. 숲을 감싸는 안개에 슬쩍 기대어, 그저 걸었다. 몇 년 전에 음습한 골목길을 무작정 걸었던 그 날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을 생각을 하니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마음을, 그렇게 잠시 덮는다.  

오래된 사유, 새로운 생각
어루만지는 빛, 감싸는 향기

-라이프앤타임 ‘숲’


매거진의 이전글 빛과 어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