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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Jun 25. 2018

바람이 분다

제주 비양도

머리가 아찔할 만큼 태양이 뜨겁다. 한낮에는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이럴 때는 후끈한 바람이라도 부는 편이 좋다. 잠시라도 위로가 되니까. 반대로 태풍이 불면 순식간에 상황이 달라진다. 커다란 불안이 세상을 잠식해버린다. 그렇게 여름 바람은 양극단에서 요동치기 일쑤였다.

금능 해변에서 바라본 비양도



비양도

삼다도(三多島)라는 말에 담겨있듯 제주는 바람과 한 몸이다. 어제는 바다 위에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결국 바깥으로 향하는 배가 너울에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배를 타고 이십 분 남짓이면 닿는 비양도까지 갈 수 있다. 뱃길이 열려서 다행이지만 하늘은 여전히 심상치 않다. 구름이 빠르게 몰려들었다가 이내 그만한 속도로 흩어진다.



비록 선실을 가득 메운 발 냄새와 갑판에 들이닥치는 파도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승객들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섬 안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항구에는 한가롭게 정박된 몇 척의 배가 있을 뿐 속절없이 고요하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적막을 깨뜨리는 작은 섬. 막연하게 상상했을 때와는 다른, 꼬마 화산섬의 진짜 모습이 마음속에 훅 밀려들어온다.


커다란 집오리가 주인 행세를 하는 슈퍼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천천히 섬을 누비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낮잠을 자도 좋다는 말에 한껏 들떠버렸다. 수차례 붓질을 더한 울퉁불퉁한 포장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점령한 갯강구가 생각보다 느리게 피하는 까닭에 종종 곡예운전을 해야 했지만, 다른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밟고 지나갈 자신은 없었다.


오늘 같이 바람이 부는 날에 자전거를 타면 몇 배로 시원해진다. 낯선 풍경과 적당히 부는 바람에 신나서 페달을 밟아대다 목덜미가 타들어 가는 것도 잊어버렸다. 여기저기 늘어선 초록은 여름 볕이 지은 옷을 입고 신나게 춤을 추고, 아무렇게나 심은 듯 자유롭게 자란 나무는 저마다 다른 꽃을 피웠다. 코끼리를 닮은 바위나 새초롬하게 둥근 둔덕은 또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까.



작은 학교가 눈에 들어오면 한 바퀴를 다 돈 셈이다. 자전거를 타고 바깥을 뱅뱅 돌았으니 이제는 안으로 들어갈 차례. 한 여름을 망각한 채 오르막 따위야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봉우리는 생각보다 꼭꼭 숨어있었다. 어떤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때로는 키보다 높은 수풀을 헤치며 안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정상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두 다리를 휘감는 것 같아서 서 있는 것조차 녹록지 않았다. 건너편 해변은 여전히 푸르기만 하다. 바다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은 이런 바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귓가에 살랑이는 바람 따위는 옛 일이라는 듯 거세게 휘몰아친다. 그래, 여기가 바람의 섬이었지. 여름 바람은 항상 이렇게 우리를 들었다 놨다 했는데, 잠시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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