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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Apr 30. 2019

동행의 기억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잊힌 이름이 있다. 그 날, 그 장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 분명히 실재했지만 아렴풋해진 동행의 기억. 빠르게 달아오른 만큼 쉽게 식어버렸다가 가끔씩 이렇게 되살아나곤 한다.



Agrigento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남부에 위치한 아그리젠토(Agrigento)에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남아있다. 기원전 6세기에 식민지로 개발되어 인구가 십만이 넘을 정도로 번성했다는 설명이 붙어있는 곳. 메마른 땅 위에 남아있는 부서진 과거를 지나 언덕의 신전에 올라서면 바다와 함께 주변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북부의 팔레르모에서 버스로 왕복 여섯 시간이라니,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동네를 어슬렁대며 하루를 보냈을게 분명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과 함께하며 서로의 의지가 되는, 짧은 동행. 그렇게 우리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흙길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온전하진 않지만 살아남은 것은 그런대로, 부서진 것은 적당히 한데 모아 두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조각일지언정 우리의 몸뚱이보다 훨씬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았는지 알법한 규모. 몇 천년 된 신전과 십 년 된 청동 조각상은 환장의 짝꿍이 되어 기념사진의 단골 배경으로 활약했다. 우리 역시 오늘만큼은 혼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서로의 사진사가 되어 순간을 기록했다.    



온통 황토색이다. 어쩌다 한 번 만나는 나무 그늘이 그렇게 귀한 줄 몰랐다. 수풀이 무성한 계곡 탐방 코스를 봤을 때는 정말 욕심이 났다. 우리는 재차 시계를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자신의 판단을 온전히 믿을 수 없을 때 함께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된다. 그날은 더욱 그랬다. 돌아가는 버스에 문제가 생겨서 아찔했던 순간, 그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역시 대부분의 동행이 그렇듯 사진을 주고받은 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이름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렸다. 커다란 캐리어와 치약 몇 상자, 경상도 사투리, 단호한 말투 같은 것만 떠오른다. 그래도 나의 아그리젠토에서 그녀를 떼놓을 수는 없다. 우연한 동행은 그렇게 여행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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